안 쓰이는 곳이 없다, ‘전자산업의 쌀’ 반도체 이야기
반도체는 ‘전자산업의 쌀’로 불릴 만큼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폭넓게 쓰이고 있습니다. 반도체 발전의 역사는 트랜지스터 개발사, 그리고 (한정된 공간에 이를 얼마나 많이 넣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집적회로 발달사로 요약할 수 있는데요. 트랜지스터의 등장 덕에 전자제품이 소형화돼 ‘휴대’ 개념이 만들어졌고, 집적회로의 발달은 컴퓨터의 발전과 보급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반도체의 발전으로 기업은 업무의 효율화를 꾀할 수 있었고 개인은 인터넷과 영화 감상, 게임 등 새로운 여가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됐습니다. 최근엔 모바일 반도체의 발달로 스마트폰과 웨어러블 컴퓨터가 등장하며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크게 바꿔가고 있습니다. 오늘 ‘S/I/M에서 만난 삼성전자 이야기’는 수많은 기업의 노력이 엿보이는 반도체 발전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트랜지스터 출현 이전 ‘집채만 한’ 컴퓨터의 등장
반도체의 기본 재료인 트랜지스터가 개발되기 전 전자제품의 주재료는 진공관이었습니다. 진공관을 이용한 당시 전자 제품은 기술적 한계 때문에 오늘날에 비해 매우 크고 무거운 편이었는데요. 당시 제품 몇 가지를 만나볼까요?
▲대성당 형태를 본뜬 진공관 라디오 ‘필코 90’
첫 번째 제품은 ‘대성당’ 형상을 본뜬 독특한 디자인으로 제작된 진공관 라디오 ‘필코 90’입니다. 1930년대에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이 라디오는 높이 45㎝, 무게 18㎏에 9개 진공관이 쓰인 탁상용 제품이었습니다.
▲최초의 다목적 전자식 진공관 컴퓨터 ‘에니악’
두 번째 제품은 1946년 당시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University of Pennsylvania) 교수였던 존 윌리엄 모클리(John William Mauchly)와 존 프레스퍼 에커트 주니어(John Presper Eckert Jr.)가 만든 최초의 전자식 진공관 컴퓨터 ‘에니악(ENIAC, 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and Calculator)’입니다. 미 육군의 탄도 거리 계산을 목적으로 제작된 이 컴퓨터의 개발 기간은 무려 3년! △7만 개의 저항기 △1만 개의 축전기 △1500개의 계전기 △6000개의 기계식 스위치 △1만 7468개의 진공관이 사용됐고 크기는 약 167㎡, 무게는 약 27t이었습니다.
가장 위대한 현대 발명품, 트랜지스터의 등장
트랜지스터는 현대의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로 꼽힙니다. 진공관보다 부피는 작지만 속도는 빠르고 전력 소비량은 적어 복잡한 회로를 소형화하기에 유리한데요.
1947년 미국 벨연구소(Bell Lab) 소속 학자였던 월터 하우저 브래튼(Walter Houser Brattain)과 존 바딘(John Bardeen), 윌리엄 브래드퍼드 쇼클리(William Bradford Shockley) 등 세 사람은 저마늄(Germanium, Ge)을 이용해 전도율이 전환되는 증폭기를 개발했는데요. 이게 바로 최초의 트랜지스터입니다. 훗날 세 사람은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하기도 했죠.
트랜지스터의 등장에 힘입어 벨연구소는 1954년 최초의 트랜지스터 컴퓨터인 ‘트래딕(TRADIC)’을 발명하는데요. 트래딕엔 약 800개의 트랜지스터와 1만여 개의 저마늄(Germanium) 수정 정류기가 각각 사용됐습니다. 처리 속도는 진공관 컴퓨터와 비슷했지만 크기는 에니악의 300분의 1로 줄었으니 정말 대단한 발전이죠?
집적회로 개발로 드디어 막 오른 ‘PC 시대’
1958년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exas Instruments)사의 잭 킬비(Jack Kilby)는 세계 최초로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 IC)를 개발했습니다. 트랜지스터가 진공관을 대체하며 전자 제품의 크기를 줄였다면, 집적회로는 트랜지스터를 서로 연결하는 전선을 없애며 전자 장비의 크기를 더욱 획기적으로 줄였습니다. 물론 성능도 크게 향상됐죠.
당시 미국과 소련(오늘날의 러시아)은 냉전으로 대립하며 군사용 컴퓨터를 적극적으로 개발했는데요. 그 여파로 상업용 컴퓨터 시장도 함께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주로 기업 업무용 컴퓨터가 생산됐지만 반도체 장비의 성능이 향상되고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개인에게까지 컴퓨터가 보급됐죠. 그리고 이는 인터넷 시대 도래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역사, 그리고 삼성전자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건 1960년대 후반입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가 전자산업 발전을 목표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인데요. 각종 지원으로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기업의 전자산업 참여를 권유했던 것 등이 대표적 예입니다.
1965년 미국 코미(Komy)그룹 투자로 설립된 고미(高美)반도체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1966년 시그네틱스사(Signetics社)와 1969년 도시바사(Toshiba社)가 차례로 한국에 공장을 설립하며 국내에도 반도체 산업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습니다.
삼성전자는 1974년 한국반도체 지분을 인수하며 반도체 사업에 첫발을 뗐습니다. 반도체가 미래 전자산업 성공의 열쇠가 되리란 사실을 일찌감치 내다본 결정이었죠.
▲삼성전자가 1983년 개발에 성공한 64Kb D램
이후 약 10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삼성전자는 첨단 기술이 요구되는 고집적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고, 1983년 세계에서 세 번째이자 우리나라 최초로 64Kb D램 개발에 성공하며 명성을 쌓기 시작했는데요. 삼성전자가 만든 64Kb D램은 지난 2013년 8월 대한민국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64Kb D램의 탄생을 발판 삼아 반도체 개발에 매진한 삼성전자는 1992년 세계 최초로 64Mb D램 개발에 성공,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는데요. 이 여세를 몰아 1994년 8월엔 또 다시 세계 최초로 256Mb D램 개발에 성공하며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게 됩니다.
반도체 사업에서 승승장구하던 삼성전자엔 사실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 사용하던 6인치 웨이퍼(Wafer, 집적 회로를 만들 때 쓰는 실리콘 단결정의 얇은 판)를 8인치 웨이퍼로 늘리는 문제였는데요. 8인치 웨이퍼는 6인치보다 생산성이 1.8배 높을 뿐 아니라 제조원가도 20%가량 낮았습니다.
하지만 웨이퍼를 바꾼다는 게 말처럼 쉽진 않았습니다. 6인치에 맞춰진 기계설비 일체를 바꾸는 신규 시설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초미세 공정으로 이뤄지는 반도체 생산 과정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공사 이후에도 이전과 동일한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여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삼성전자는 도전을 결정했습니다. 1993년부터 본격적인 8인치 웨이퍼 생산에 돌입한 거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다른 기업이 웨이퍼 1장당 200개의 반도체 칩을 만들어낼 때 350개씩 생산하는 놀라운 생산성을 보이며 반도체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시장점유율 1위에 올라선 거죠. 결과적으로 8인치 웨이퍼 생산 결정은 이후 삼성전자가 반도체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 큰 시발점이 됐습니다.
반도체 원리, S/I/M에서 그림으로 배워보세요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Samsung Innovation Museum, 이하 S/I/M)엔 반도체 개발사와 작동 원리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체험 코너가 있습니다. 터치 디스플레이(Touch Display)를 누르면 웨이퍼의 탄생 과정, 회로의 연결 원리 등 단계별 반도체 제조 과정을 그림으로 만나볼 수 있죠. 이 공간은 과학에 관심 있는 어린이들에게 특히 좋은 학습 현장입니다. 오는 주말, 공부와 놀이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을 수 있는 S/I/M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보는 건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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