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 에세이] 나는 ‘좋아요(like)’가 그리 좋지 않다

2015/08/07 by 양승철
공유 레이어 열기/닫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투모로우 에세이] 나는 ‘좋아요(like)’가 그리 좋지 않다

양승철 GQ코리아 에디터


진 트웬지(Jean Twenge) 미국 샌디에이고주립대 심리학과 교수에 따르면 자기애(自己愛)는 1980년대에 급속도로 성장해 최근 절정에 다다랐다. 크리스토퍼 카펜터(Christopher J. Carpenter) 미국 웨스턴일리노이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지난 2012년 ‘페이스북에서의 나르시시즘(Narcissism on Facebook: Self-promotional and anti-social behavior)’이란 논문을 통해 “페이스북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일수록 나르시시즘 성향이 강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거대한 ‘SNS 파도’, 잘 피하고 계신가요?

나르시스 신화에 대해선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젊고 매력적인 청년 ‘나르키소스’가 자신의 모습만 쳐다보다 강물에 빠져 죽은 후 그 강변에 수선화의 일종인 ‘나르시서스(narcissus)’가 자랐단 얘기. 그런데 최근 이 나르시서스가 만개할 수 있는 환경이 제대로 갖춰졌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는, 깨끗한 물과 비옥한 양분과 충분한 햇볕을 만난 덕분이다.

사실 SNS로 인해 사람들이 이전보다 자신을 드러내고 꾸미는 데 애쓰게 됐다는 얘기, 좀 지겹다. 소셜 미디어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말도 어쩐지 ‘(미디어 세상의 빠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구세대의 변명’인 것 같아 미덥잖다.

다양한 SNS의 파도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사회는, 사회의 일부인 기업은, 기업에 속한 직원은, 그리고 직원인 동시에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SNS의 파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소설가 김연수는 일찍이 말했다. ‘파도는 바다의 일’이라고(그는 지난 2012년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란 소설을 펴냈다). 이제 홍보와 마케팅, 미디어 등 ‘뭔가를 알려야 하는’ 업무 종사자가 최우선적으로 신경 써야 하는 일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하게 SNS를 향한다.

사생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린 어렵잖게 타인의 일상을 볼 수 있다. 타인에게 자신의 근황을 알릴 수 있는 도구도 손에 쥐었다. 2011년 방영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SBS)에서 ‘정기준’(윤제문 분)은 “백성이 쉽게 쓸 수 있는 글을 만들겠다”는 ‘이도’(한석규 분)에게 반박하며 말한다. “글자를 알면 자연히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되고, 읽는 즐거움을 알면 깨이게 되고 글 쓰는 즐거움을 알게 된다. 쓰는 즐거움을 알면 세상을 향해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하물며 우리에겐 ‘글’을 넘어 ‘사진’과 ‘동영상’까지 실시간으로 올릴 수 있는 스마트폰이 있다. 세상을 향해 ‘나’를 알리고 싶은 건 당연지사. 글 쓰는 것만 해도 즐거운데 이미지까지 만들 수 있다니!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 그 이면의 허상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는 지점엔 여러 가지가 있다. 나이∙성별∙지역∙학교처럼 이력서에 쓸 정도로 객관적인 지표도, 성향이나 취향처럼 스스로 생각해도 ‘모호하다’ 싶은 지표도 있다. 일찍이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1979년 펴낸 저서 ‘구별 짓기’(원제 ‘La Distinction’)에서 "취향이 품격을 정한다"고 했다. 즐겨 듣는 음악, 자주 하는 스포츠, 좋아하는 음식과 패션이 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얘기다.

여성 네명이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입니다

부르디외가 말한 바로 그 ‘문화적 자본’을 우린 매일같이 SNS에 올린다. 뭘 먹었는지, 뭘 샀는지, 뭘 보고 입고 들었는지…. 한 끼 식사와 영화 티켓, 음반 재킷, 공연 실황, 뮤지컬 커튼콜, 신발(과 그 신발이 딛고 있는 쇼핑몰) 따위가 자신을 나타내는 수단이(라고 굳게 믿는)다. 콜라주로 조금씩 오려 붙이듯 경험의 증거들을 글과 사진으로, 동영상과 해시태그로 남긴다. 그러곤 ‘좋아요(like)’로 소통한(다고 또 굳게 믿는)다.

제프리 밀러 미국 뉴멕시코대 진화심리학 교수는 지난 2009년 자신의 저서 ‘스펜트’(원제 ‘Spent: Sex, Evolution, and Consumer Behavior’)에서 “인류는 짝을 유혹하고 친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3만 년간 진화해왔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이 각종 상품과 서비스로 자신을 과시하거나 치장하는 건 단지 소비 행위 자체가 주는 직접적 만족 때문이 아니라 “타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쉽게 말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일종의 ‘신호’를 보낸다는 얘기다.

여성과 남성이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만약 밀러의 논리를 (SNS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최근 몇 년으로 한정 짓는다면 인류는 ‘좋아요’를 위해 진화해온 게 아닐까? SNS의 근간엔 ‘좋아요’ 버튼밖에 없다. 가끔씩 댓글로 반대 의견을 피력하는 이도 있지만 대다수는 ‘좋아요’를 위해 움직인다. 누구도 ‘싫다’고 느끼지 않을 만한 요소를 부지런히 찾는다. 강아지와 고양이, 예쁜 얼굴과 날씬한 몸, 먹음직스러운 음식과 맛집….

어느 순간부터 우린 각자의 계정에 쌓인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말하자면 ‘좋아요 로직’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많이 좋아요’ 하는 건 어떤 대상과 경험, 사진인지가 주요 분석 내용이다. 그러는 사이, 진짜 좋아하는 것 대신 남이 좋아해줄 만한 것 위주로 세상만사를 빠르게 흡수한다. 마치 원래부터 그게 자신이 ‘좋아요’ 했던 것인 마냥. 제프리 밀러식(式) 관점에서 본다면 우린 점점 더 ‘남이 싫어할 수 없는 나’로 남고자 노력할 것이다. ‘싫어요’란 버튼은 애초부터 없었으니까.

 

이 영화 소감 올리면 ‘좋아요’ 많이 받을까?

‘좋아요’의 위력에 눌려 사는 우린 매일, 매시간 누가 자신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지 ‘수치’로 확인한다. 매분, 매초 누군가가 남긴 ‘좋아요’를 메시지로 전달 받는다. 아니, 좋다는데 누가 그 신호에 초연할 수 있겠나. 먹은 음식을, 만난 사람을, 본 공연을, 그래서 끝내 ‘나’를 좋아한다는데 말이다.

현대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좋아요’ 개수나 ‘팔로워’ 수를 통해 부르디외의 말마따나 타인과 자신을 구별 지을 수도, 밀러의 주장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과시할 수도 있다. 다만 이를 위해선 ‘(되도록 많은) 사람이 좋아할 만한 경험’을 재빨리 찾아야 한다.

각진 거울로 다양한 모습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볼 때도 작품 선정 기준은 “내가 이 영화를 지지한다고 알리면 ‘좋아요’를 얼마나 얻을 수 있을까?”가 돼야 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전 이미 그 영화를 지지할 마음부터 품는다. 영화를 보며 그런 생각을 다시금 확인한 후 예의 SNS를 통해 그 의사를 결연히 알린다.

어디 영화뿐이겠는가. ‘SNS 세대’의 문화 활동은 하나같이 비슷한 유형으로 이뤄진다. 수많은 사전 정보를 통해 대중의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요소를 정한 후, 제대로 된 비평보다는 자신의 ‘좋아요’를 SNS로 알리기 위해 해당 문화를 소비하는 것이다.

 

‘조이’와 ‘새드니스’가 공존해야 하는 이유

사람들이 감정을 표현한 얼굴 장식을 들고 있습니다

최근 개봉한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의 메인 포스터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진짜 나를 만날 시간” 극중 ‘라일리’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감정 컨트롤 본부엔 ‘조이(기쁨)’와 ‘새드니스(슬픔)’, ‘디스거스트(까칠)’와 ‘피어(소심)’, ‘앵거(버럭)’가 살고 있다. 조이는 새드니스의 존재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점차 사람 감정에 왜 기쁨만큼 슬픔이 있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진짜 나’란 뭘까? 기쁨과 슬픔이 공존했을 때 우리가 각자 ‘진짜’로 존재한다면 같은 논리로 뭔가를 싫어하는 것 역시 우리의 진짜 모습 중 하나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싫어요’란 소릴 듣는 것도 마찬가지일 터. SNS를 헤매며 ‘좋아요’를 좇고 기뻐하는 사이, 우리의 개인적 성격(個性)은 가짜로만 채워지고 있는 게 아닐까?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필자의 또 다른 에세이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투모로우 에세이] ‘무작정 여행’을 찬양함

by 양승철

아르스프락시아 팀장 (삼성전자 에세이 필진 1기)

기획·연재 > 오피니언

기획·연재 > 오피니언 > 외부 기고

삼성전자 뉴스룸의 직접 제작한 기사와 이미지는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성전자 뉴스룸이 제공받은 일부 기사와 이미지는 사용에 제한이 있습니다.
<삼성전자 뉴스룸 콘텐츠 이용에 대한 안내 바로가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