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 에세이] 다시 스물이 된다면

곽정은 칼럼니스트

서른 살 즈음이었을 거다, 날 포함한 내 또래들이 스무 살을 상상하기 시작한 건. 스물. 막상 그 나이일 땐 특별한 줄 모르다가 세월이 오래 지난 후에야 비로소 돌아볼 수 있게 되는 시간들. ‘다시 스무 살이 되면 어떻게 살아갈까?’ 직장인이 된 후에도 여러 해를 보내고 서른을 넘기며 거기에 또 나이를 차곡차곡 쌓아갈 무렵,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 질문을 떠올렸다. 그러곤 ‘지금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돼버린 것들’을 아프게 추억했다.

서른보다 마흔에 더 가까워진 요즘도 친구들과 만나면 가끔 ‘스무 살로 돌아가는 상상’을 끄집어낸다. 물론 서른 살 때처럼 다들 공감하진 않는다. “얘, 마흔이 다 돼가는데 그런 상상은 해서 뭐하니?” 그런 핀잔도 오간다. ‘지나온 스무 살에 대한 미련’은 혼자 있을 때도 불쑥 들이닥친다. 이를테면 스무 살 안팎의 대학생들 앞에서 강연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때로 돌아간다면 난 어떻게 살까?’란 질문이 머릿속을 퍼뜩 스친다. 그저 풋풋하다, 는 형용사만으론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스물들’과 마주하고 나눈 대화 때문이겠지.

두려움 따위, 과감히 떨쳐낼 거다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이란 가정(假定)은 결국 ‘스무 살에 하지 못해 땅을 치고 후회했던 일들’과 맞닿아 있다.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니 중요했던 것들, 그때만 해도 두려워서 도전하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리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들….

내 경우, 가장 가슴에 사무치는 건 ‘여행’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랬을까?’ 싶지만 사실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난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확신하는 쪽이었다. 어학연수나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알아보고 유럽 배낭여행 계획을 짜는 친구들을 보면서도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하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열심히 집과 학교만 오갔다.

지금 그때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 한심하지 그지없다. 하지만 스무 살의 내가 더 안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어쩌면 당시 내 감정이 ‘귀찮음’보다 ‘두려움’에 가까웠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을 떠나 나 자신을 혼자 둔다는 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에 날 데려다 놓는다는 게 그 자체로 내 안의 공포심을 자극했던 건 아닐까?

용감하게 떠나 새로운 뭔가에 도전하는 친구들을, 난 내심 부러워했던 것 같다. 모든 게 처음이고 그래서 용기 내지 못했던 시기, 내 스무 살을 딱 하나의 키워드로 정리한다면 그건 아마 ‘두려움’일 것이다. 주머니는 풍족하지 않아도 시간만은 충만했던 시절, 사회에 나온 후에야 뼈저리게 깨달은 ‘내 시간의 소중함’을 그때 미리 알았다면 난 두려움 없는 스물을 살았을까?

조바심 내지 않고 느긋해질 거다

아쉬운 건 또 있다. 내 스무 살은 주변 모든 것에 대한 조바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느긋함과 20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조바심을 낼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남자친구를 사귀지 못했을 땐 영영 이대로 혼자 남겨질까 봐 안절부절못했고, 쪽지 시험을 망친 날이면 학점이 엉망진창으로 나올까 봐 성적이 나오는 학기 말이 될 때까지 좌불안석이었다. 정작 맘을 열고 누군가를 만날 자신도 없었으면서, 수업을 열심히 듣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그저 조바심만 낸 것이다.

타인에게 어떻게든 인정 받길 원하면서도 실제론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았던 스무 살의 나. 당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그저 ‘난 지금 조바심을 느끼고 있으며 불안하다’는 사실 자체를 위안거리로 삼는 것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도 조바심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하다. 세상에 조바심만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는 걸 스무 살 때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 시절, 스무 살의 내게 좀 더 친절했다면 어땠을까? 매사 안달인 나 자신을 자꾸 채근하기보다 ‘조금만 느긋하게 마음 먹어보자’며 다독였다면, 과감하게 ‘나와의 대화’를 시도했다면 지금과 좀 달라졌을까? 스물은 ‘자기 인식’이란 측면에서 더할 나위 없이 핵심적인 시간이다. 지금의 내가 ‘스무 살의 곽정은’과 충분히 친해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 건 그 때문이다. (물론 자신과 친해질 수 있는 시기란 게 따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시기별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말랑하고 폭신하던 시절의 자신과 친해지는 쪽이, 군데군데 마모되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자신과 친해지는 쪽보다 한결 수월할 테니까.)

대단찮은 일상도 꾸준히 쓸 거다

매일의 일상을 글로 옮기는 일도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꼭 실천하고 싶다. 거창할 필요도 없다. 늘 반복되는 일상이라 해도 하루를 살며 갖게 된 상념들을 그저 기록해두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치 있다. ‘나’란 존재가 어떻게 성장했고 또 달라졌는지 비춰주는 거울로 글만 한 게 없기 때문이다. 단 하루도 무의미하게 지나간 날은 없었을 텐데 스무 살 언저리의 내 생각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문득 서글퍼진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해보겠다

이 글이 누군가에겐 ‘서른을 훌쩍 넘긴 여자의 신세 한탄’ 정도로 읽힐 수도 있겠다, 는 생각에 (아뿔싸!) 슬슬 또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타임머신을 타지 않는 이상 십 수 년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건 애초 불가능한 일, 과거에 대한 회한으로 이 글을 시작한 건 아니다. 더욱이 여행 떠나기, 느긋해지기, 일상 기록하기…. 셋 다 지금의 나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더 이상 ‘스물이 아니니까’란 핑계로 후회할 거리를 또 만들며 살 순 없다. 스무 살의 여행보다 쉬이 피곤해지고 자주 무릎이 시큰거리겠지만 여행을 떠나겠다. 스물의 나 자신과 대화하는 것보다 까다롭겠지만 그래도 시도해보겠다. 스무 살의 기록보다 재밌을 거란 보장은 못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매일 한 자씩, 또박또박 적어나가겠다.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내겐 오늘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오롯이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겠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가 됐든.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