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 에세이] 당신의 집에 ‘이름’을 붙여주세요
이일훈 건축가
누구나 이름을 갖고 있다. 누가 날 이를 때 내 이름이 불리고, 내가 누군가 찾을 때도 그이의 이름을 부른다. ‘이름 없음’은 흐릿하고 밋밋함을, ‘이름 있음’은 확실한 존재감을 각각 뜻한다. 오죽하면 유∙무명을 가르는 관용구가 ‘이름 있다(없다)’일까.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의미 그 자체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도 꽃보다 이름이 먼저 나온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름을 부르는 순간, 꽃이 된다. 이때 꽃이란 ‘의식의 깨어남’이고 ‘존재의 자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누구나 “누군가의 꽃”이 되고 싶어한다. “잊혀지지(잊히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길 꿈꾼다.
매월당∙사임당… 집 이름이 곧 아호였던 선인들
어디 사람만이랴. 사물도 이름을 지닌다. 당연히 집에도, 건축과 공간에도 이름이 필요하다. 주소를 무심히 ‘123번지 4호’ ‘1105호’로 적고 부르면 단순 기호나 분류 번호에 불과하지만 ‘아무개의 집’이라 칭하면 고유명사가 된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여러 의미, 이를테면 이루고 싶은 뜻이나 만들고 싶은 공간 등을 더해 집 이름을 지으면 그건 의지의 표현이자 상징이 된다. 그게 바로 당호(堂號) 또는 옥호(屋號)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위치한 다산초당(사진 출처: 한국관광공사/출처가 명기된 이미지는 무단 게재, 재배포할 수 없습니다)
옛사람 중엔 자신의 의식구조가 담긴 당호를 아호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여유당, 매월당, 완당, 사임당, 만취당은 각각 정약용, 김시습, 김정희, 신씨, 권율 장군의 당호이자 아호다. 집(공간)을 인격화하고 거처에 철학을 담아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시도였던 셈이다.
당호엔 이런 한자들이 주로 쓰인다. ‘집 당(堂)’ ‘집 헌(軒)’ ‘집 재(齋)’ ‘다락 루(樓)’ ‘움집 와(窩)’ ‘방 방(房)’ ‘정자 정(亭)’ ‘집 실(室)’ ‘집 각(閣)’ ‘농막집 려(廬)’ ‘암자 암(庵)’…. 그 중 몇몇 사례는 꽤 흥미롭다.
함허루(涵虛樓)는 경북 경주 양동마을 심수정 대청마루에 걸린 편액에 쓰여 있던 누각 이름이다. ‘함허’는 ‘허공에 흠뻑 잠기다’ 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기다’란 뜻이다. 인위적 공간에서나마 무위자연을 즐기려는 꿈을 담은, 참으로 시적인 표현이다.
▲이언적의 사랑채 '독락당'엔 '외로움'을 '즐거움'으로 승화하려는 주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사진 출처: 한국관광공사/출처가 명기된 이미지는 무단 게재, 재배포할 수 없습니다)
독락당(獨樂堂)은 조선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1491~1553)이 파직된 후 낙향해 지은 집의 사랑채 명칭이다. ‘홀로 즐긴다’는 뜻이 맘에 들어서였을까, 옛 집 이름 중엔 유독 ‘독락’이란 표현이 들어간 게 많았다. 독락정, 독락재, 독락와, 독락암…. 사실 혼자 있는 건 즐거운 일이라기보다 외로운 일이다. 그렇게 볼 때 ‘독락’은 혼자서 즐거움을 독차지하는 게 아니라 즐거움을 여럿이 나눠 더 여유롭게 하려는 역설인지도 모르겠다. 역시 경주(안강읍 옥산리)에 있다.
희우정(喜雨亭)의 ‘희우’는 가뭄 끝에 오는 비를 이른다. 숙종 16년(1690), 가뭄이 들자 왕이 기우제를 지냈고 다행히 희우를 맞았다. ‘덕 없는 임금’이란 비난을 피하게 됐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단비를 맞는 반가움이 고스란히 전각 이름에 녹아들었다. 창덕궁 후원에 있다.
▲윤선도 고택 '녹우당'엔 '때 맞춰 단비가 내려주길 기원하는' 농부의 바람이 녹아있다(사진 출처: 한국관광공사/출처가 명기된 이미지는 무단 게재, 재배포할 수 없습니다)
녹우당(綠雨堂)은 전남 해남에 위치한 조선 중기 문신 고산 윤선도(1587~1671)의 고택이다. 선인들은 같은 비라도 내리는 때에 따라 다른 명칭으로 불렀다. 매실이 익을 무렵 내리는 비엔 ‘매우(梅雨)’, 보리가 익을 즈음 내리는 비엔 ‘맥우(麥雨)’, 무더운 여름날 내리는 비엔 ‘서우(暑雨)’란 이름이 각각 붙여졌다. ‘녹우’는 늦봄에서 여름 사이, 초목이 한창 푸를 때 내리는 비를 일컫는다. 대지에 뿌리 내린 생명을 살리는 ‘축복의 물’쯤 되겠다. 녹우당엔 비가 때 맞춰 내려주길 기원하는 농부 주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충남 논산 개태사에서 만난 우주당(宇宙堂)의 ‘우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전적 의미의 그 우주다. ‘우(宇)’는 광활한 공간을, ‘주(宙)’는 무한한 시간을 각각 이른다. 집의 의미를 이처럼 넓고 깊게 해석한 공간이 또 있을까. 이 집의 주인은 집(건축)을 ‘공간과 시간의 총화’로 보고 있다. 여기에 ‘당(堂)’은 땅을 이르기도 하니 건축의 본질적 구성 인자(공간‧시간‧장소)를 다 갖춘 집이라고 하겠다. 훈(뜻)으로만 읽으면 ‘집집집’이다.
건물 감상도, ‘내 집’에 이름 짓기도 다 건축이다
가끔 대중 강연을 한다. 그곳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늘 해주는 말이 있다.
“돈 들여 직접 집을 짓거나 고치는 것만이 건축은 아닙니다. 문화재부터 현대 건물까지 다양한 건축물을 탐방하고 공공 건축에 관심을 갖는 것 역시 건축입니다. 건축물 감상은 차비 정도만 들이면 얼마든지 많은 걸 배울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즐거움도 따릅니다. 그런데 차비조차 들일 필요 없이 즐길 수 있는 건축 행위도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집이나 방에 이름을 붙이고 불러주는 일입니다.”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전세든 월세든 상관없다. 공간의 주체는 ‘사용하는 사람’이니까. 당신이 쓰는 공간에 당신이 살고 싶은 방식을 생각해 이름을 붙여보시라. 꼭 한자일 필요는 없다. 한글이든 영어든 본인의 생각만 투영하면 된다. 그렇게 정한 이름을 휴대전화 레터링에도, 발신자 알림 표시에도, 이메일 아이디로도 사용해보자. 정성 들여 쓴 집 이름을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쓰는 것도 좋겠다. 그 역시 건축을 손쉽고 근사하게 즐기는 방법이다.
당신이 머무는 장소가 단지 ‘콘크리트 상자’가 아니라 ‘내게 특별한 의미로 축성된 공간’이라면 그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집에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하다니 건축, 참 쉽고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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