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 에세이] 어떤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드세요?

2015/11/20 by 이일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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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모로우 에세이 어떤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드세요? 여러분의 취향에 '맛'과 '멋'을 더해줄 에세이스트 8인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매주 목·금요일 투모로우 블로그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일훈 건축가


 

이런저런 자리에서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 “이제까지의 작품 중 어떤 게 제일 마음에 드세요?” 이런 얘길 들을 때면 참 난감해진다.

우선 ‘작품’이란 말이 품고 있는 의미가 꽤나 다중적이다. 작품은 단순히 ‘만든(作) 물건(品)’을 뜻하기도 하고 ‘잘 꾸며진 일이나 훌륭하게 만들어졌다고 여겨지는 물건 등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장 널리 통용되는 의미는 ‘예술 창작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건축물을 가리켜 ‘작품’이라고 하면 ‘예술로서의 건축’이 되기도, ‘물건으로서의 건물’이 되기도 한다. 예술과 물건, 둘의 간극은 메울 수 있는 성격이 아니어서 묻는 이가 건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당연히 대답도 쉬이 나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팔을 걷어부치고 건축설계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혹자는 건축 ‘작품’을 학술‧기술‧예술의 총화로 받아들인다. 혹자는 ‘(건축주의 요구나 삶의 방식, 경제성 등은 무시한 채) 건축가 개인의 자의적 판단에 치중해 완성한 결과물’로 건축을 짐작하기도 한다. 건축을 환경의 일부로 여겨 사용자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여기는 사람은 건축의 심리적‧사회적‧미적 가치에 주목한다. 반면, “건물은 그저 재화(부동산)일 뿐”이라 여기는 사람은 건축을 오로지 금전적 가치로 환산하려 한다.

이해의 방향과 폭이 전혀 다르니 같은 건축물을 놓고도 ‘예술’과 ‘상품’으로 시선이 갈린다. 그러니 “어떤 작품이 마음에 드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괜스레 뒤숭숭해진다. 내가 건축에 ‘작품’이란 표현을 잘 쓰지 않으려 조심하는 건 그 때문이다. 내게 건축은 그저 ‘작업’일 뿐이다.

 

좋은 건축을 완성하는 건 건축주의 ‘마음’

사람들이 ‘(마음에 드는) 작품’을 꼽는 기준이 뭔진 모르겠지만 내가 중시하는 ‘작업’의 기준은 사람, 곧 건축주(의뢰인)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건축주의 마음(의식)이다. 이때 마음이란 대략 이런 것이다. △건축(공간)이 일상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마음 △건축(혹은 공간∙장소)은 주변(이웃)과 어울려야 한다고 믿는 마음 △건축 과정에서 의문이 생기고 불확실한 건 질문하고 대화하되, 결론은 전적으로 건축가에게 맡기는 마음 △“건축은 물질로 구축되지만 실은 정신의 구현”이란 마음….

안전모를 쓴 건축가가 설계도를 보고 설명하는 사진입니다.

그런 마음을 지닌 건축주는 주택‧별장‧사옥‧상업시설 등 어떤 걸 지어도 주변에 위세 부리지 않는 ‘건강한 건축(혹은 공간‧장소)을 경영한다. 반면, 겉으론 건축가를 존중하는 척하면서 의사 번복이 잦고 매사 의심하는 건축주는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문화‧복지시설을 만들어도 불량한 건축(시설)을 경영한다.

결국 좋은 건축(물)의 시작과 운용은 건축주의 마음에서 기인한다. 건축주든 건축가든 과시욕이 앞서 불순한 마음을 먹고 완성한 건축물은 제아무리 ‘작품’으로 불려도 신통찮은 물건에 불과하다. 같은 논리로 ‘건축을 통해 대지(장소)에 축복을 내리려는’ 자세로 임한다면 시시해 보이는 작업도 근사한 건축으로 완성될 수 있다.

 

‘작은 큰집’, 그리고 ‘우리안의 미래’ 연수원

언젠가 한 건축주가 “시골에 집터를 구했으니 와보라”기에 찾아간 적이 있다. 그곳엔 오래전 누군가 경사지를 두부 자르듯 심하게 파내고 지은, 낡은 집이 한 채 있었다. “이 상태로 고치든 헐고 새로 짓든 마음대로 하라”는 말에 한참을 살펴보니 집 짓느라 잘려 나간 땅이 아파하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지형(땅)을 회복시켜주고, 치유해주고 싶었다.

잔디가 깔린 곳에 작은 집이 있고 주변 경사진 지형은 파인 사진입니다.
▲'작은 큰집' 풍경 (사진 출처: 이일훈/출처가 명기된 이미지는 무단 게재, 재배포할 수 없습니다) 

“새로 집을 지으며 오래전 훼손된 지형까지 되살리면 좋겠다”고 했더니 건축주는 “돈이 더 들더라도 산자락의 흐름(지형)을 되살릴 수 있다면 산에 덜 미안할 것 같다”며 오히려 기꺼워했다. ‘아, 난 겨우 집 들어갈 자리(부분)만 보는데 이 분은 산(전체)을 보는구나!’ “살림은 형편대로 갖추되, 집과 연결된 주변 지형과 환경을 더 보살피고 아껴야 한다”는 의젓하고 큰 생각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번잡스러워질까 봐 당시엔 세상에 알리지 않았던 작업(절토한 부분을 이용, 집을 앉히고 복토하느라 자연스레 집이 땅 속에 묻혔다)이지만 내 마음속엔 언제나 깊게 자리하고 있다. 집터를 보며 건축주와 대화를 나누며 집 이름(‘작은 큰집’)도 일찌감치 지었다.

‘친환경 건축’이나 ‘생태 건축’엔 많은 돈이 든다. 하지만 돈이 많다고 해서 모두가 친환경적∙생태적 건축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누구나 친환경과 생태의 개념은 말할 수 있지만 이를 실천하려면 ‘불편하게 살기’란 철학에 근본적으로 동의해야 한다. 일례로 에어컨과 보일러는 현대인의 대표적 냉∙난방 용품이다. 하지만 석유 에너지가 고갈되면 이 ‘문명의 이기(利器)’는 더 이상 누릴 수 없다.

'우리안의 미래' 살림채 전경입니다.
▲'우리안의 미래' 연수원 전경 (사진 출처: 서삼종/출처가 명기된 이미지는 무단 게재, 재배포할 수 없습니다)

한 번은 이 같은 전 지구적 우려를 개인의 문제로 인식, ‘분자로’란 이름의 독특한 소각 장치를 연구 중인 건축주를 만났다. 분자로에선 버려지는 생활 쓰레기와 못 쓰게 된 목재를 태워 에너지를 얻는다. 아직 상용화되진 않았지만 분명 의미 있는 발명이다. 경기 가평군 소재 ‘우리안의 미래’ 연수원이 바로 그곳이다.

이 연수원엔 난방 방식 외에도 여러 가지 눈에 띄는 시도가 숨어 있다. △‘세계 최초 온실이 조선시대에 있었다’는 옛 문헌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온실 바닥에 난방 기능을 갖춘 것 △편평한 목조 지붕에 흙을 얹어 잔디를 심은 것 △황토와 옻 등 전통 재료를 곳곳에 사용한 것 △못 쓰는 콘크리트를 활용해 인근 도로를 포장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하나같이 다소 불편하지만 남다른 의미를 품고 있다. 이처럼 자신의 철학을 건축에 녹여내는 건축주는 건축가에게 더없는 선생이다. “자발적 불편이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것”이란 그의 철학은 지금도 내게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힘을 준다.

 

“인간이 만든 건축이 다시 인간을 만든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 전 영국 총리는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그 건축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고 했다.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다. 처칠에 따르면 잘못된 건축은 사회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그럼 어떤 건축물을 만들어야 할까? 최소한 ‘작품을 위한 작품’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권유할 만해야 하고, 무엇보다 건강한 의식을 기반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건축이라면 결과가 ‘예술품’이든 ‘물건’이든 무슨 대수랴. ‘작품’으로 불리지 않아도 진정한 작품일 것이다. 사람을 위한, 아니 삶을 위하는 건축의 이름으로!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by 이일훈

건축연구소 후리 대표 (삼성전자 에세이 필진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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