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 에세이] 짜장면, 바다를 건너다

2015/07/24 by 박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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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오래된 한글 프로그램에선 ‘짜장면’이라고 쓰면 붉은 밑줄이 달린다. 맞춤법 자동 교정 기능 때문이다. 지금은 짜장면이라고 쓸 수 있게 됐지만 오랫동안 표준어는 ‘자장면’이었다. 짜장면을 짜장면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지난 시기의 언어 생활은 어쩌면, 중국요리와 화교의 고단한 삶을 상징하는 것 같다.

 

차이나타운의 ‘전설적 중국요릿집’ 공화춘

인천 차이나 타운의 대문 ▲인천 차이나타운 입구(출처: 한국관광공사/출처가 명기된 이미지는 무단 게재, 재배포할 수 없습니다)

경인선의 종점은 인천역이다. 그러나 인천 사람들은 ‘하인천’이라고 부른다. 인천의 가장 깊은 곳,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인천의 끝이다. 이곳에서 내려 살짝 오른쪽 정면을 보면 높게 지은 패루(牌樓)가 있다. 이 높은 대문은 전 세계 차이나타운의 상징이다. 패루 위쪽이 바로 차이나타운이다.

차이나타운을 한 바퀴 돌면 전설적인 중국요릿집 공화춘이 나온다. 1911년 설립된 공화춘은 ‘공화국의 봄’이란 뜻이다. 중국에 신해혁명이 일어나 공화정이 수립된 걸 기념하는 이름이라고 한다. 대개 역사적 건물은 실제로 보면 생각보다 작게 마련인데, 이 건물은 상당히 크다. 당시 공화춘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간다. 현재는 짜장면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짜장면 박물관▲짜장면 박물관으로 운영 중인 옛 공화춘 건물(출처: 한국관광공사/출처가 명기된 이미지는 무단 게재, 재배포할 수 없습니다)

몇 해 전 이곳에서 공화춘 창업자 우희광 선생의 손녀딸을 만났다. 그는 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남편과 함께 공화춘 인근에 중국요릿집(신승반점)을 경영하고 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젊은 남편이 요리를 맡고 있는데, 상당히 맛이 좋았다. 최근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주말엔 줄을 서야 먹을 수 있는 집이 됐다. ‘공화춘 짜장면의 맥락이 살아 있는 집’이란 소문이 났다.

한 그릇의 음식이 민족을 상징하는 경우는 흔하다. 이탈리아의 피자, 한국의 불고기, 일본의 스시는 이방인에게 곧바로 그 민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짜장면은 훨씬 더 복잡한 근현대사를 안고 있다. 한 그릇의 짜장면엔 달콤하고 구수하며 기름진, 미묘한 맛만큼이나 복잡한 역사의 나선이 휘돌아간다. 자, 1882년으로 돌아가보자.

 

짜장면의 한반도 상륙 계기가 임오군란?

구한말, 이 땅은 외세의 격전지였다. 구주 열강은 물론이고 인접국인 청과 러, 일본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다. 표면적으론 구식 군대가 차별에 반대해 일으킨 병란이었지만, 실상은 당시 한반도의 여러 모순으로 인해 발화된 사건이었다. 그 처리 과정에서 자연스레 청의 입김이 강력하게 작용했고, 같은 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된다. 조선이 청의 속방(屬邦)임을 확인하는 불공평 조약이었다.

어쨌든 이 조약을 통해 청은 자국 군대와 상업 거류민을 한반도에 보낼 근거를 얻었다. 흔히 이때부터 중국요릿집이 진출한 것으로 짐작하는데, 사실 당시 중국요릿집을 선점한 건 군인과 무역장사꾼이었다. 청은 약 3000명의 군대와 40여 명의 상인들을 합류시켜 한반도에 상륙했다. 이들 상인은 장차 한반도의 화교들과는 출신 성분도, 출신지도 달랐다. 초기 상인들은 남부 중국 출신이 많았고 대부분 무역과 일반 물자의 도매점, 소매상을 운영했다. 그 후 청의 쇠퇴와 함께 중국 내부의 모순이 폭발하게 되면서 이주민은 더욱 늘었다. 1898년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 유민이 생기고, 한반도 화교의 조상이 되는 산둥성 농민과 노동자가 대거 건너오게 된다.

짜장면 박물관 내 전시물▲짜장면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물(출처: 한국관광공사/출처가 명기된 이미지는 무단 게재, 재배포할 수 없습니다)

다시 공화춘. 우희광 선생이 인천에 발을 디딘 게 이 무렵이었다. 당시 나이 17세. 그는 잡일부터 시작해 막 생기기 시작한 중국요릿집 점원으로 신망을 얻었다. 그리고 주변 도움으로 공화춘을 개업한다. 전설이 시작된 셈이다. 이 집에서 짜장면을 초기부터 팔았는진 알 수 없다. 짜장면은 한국인이 라면 다음으로 많이 먹는 국수류인데 그 정확한 전래 기원과 발전 역사를 알 수 없다.

우희광 선생의 공화춘이 최초로 정식 식당에서 짜장면을 팔았다는 설(說)이 있다. 그 이전엔 노점에서 사 먹는 음식이었다고 전해진다. 짜장면은 인천 조계지에서 하역 노동 등에 종사하는 커울리(‘노동자’를 뜻하는 인도어, 중국어 ‘苦力<커우리>’로 음차돼 쓰인다)들의 간식이었고, 지붕 없는 노점 음식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그 시기에 중국 화북지방에서 밀가루가 수입됐고 중국인 중개무역상이 밀가루를 반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자는 풍부했을 것이다.

 

‘중국식 짜장면’은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까

짜장면

짜장면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산둥과 베이징에서 지금도 사 먹는 전통음식이 짜장면의 뿌리에 닿는다. 그 짜장면은 짠 된장을 얹고, 여러 가지 채소 고명을 얹어 먹는 음식이다. 짜장면의 스타일은 한국에 오면서 많이 바뀌게 되는데, 이는 외래 음식의 현지화 단계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일이다. 이후 짜장면은 화교 사회를 떠나 조선인에게도 크게 인기를 끌었다. 1920년대 당시 전국에 200개 정도의 중국요릿집이 있었다고 하며 서울에만 100개 넘게 번성했다.

그런데 이 중화요릿집이 모두 짜장면과 요리를 파는 집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신문 기록에 의하면 이른바 ‘호떡집’이라고 하는 간이 음식점이 더 많았을 것이다. 호떡은 우리가 아는 그 호떡이긴 한데, 밀가루로 된 여러 음식을 파는 간이식당을 통칭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호떡은 물론, 계란빵·공갈빵·만두·찐빵 따위를 같이 팔았다. 이런 중국식 빵집은 나중에 더 분화된다. 만두와 찐빵을 파는 분식집은 조선인, 그리고 전후에 한국인도 기술을 배워 가게를 차려 하나의 독립적 업태가 됐다. 1960년대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요릿집에서 기술을 배운 한국인이 197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중국집’의 모태가 된 것과 비슷하다.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화교(주로 산둥성 출신)의 이주는 가속된다. 화교 숫자는 이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발발로 줄어들다 해방(1945년) 이후 다시 늘기 시작한다. 산둥성은 농사 짓기 좋은 땅이지만 당시 거대한 한발과 강의 범람 등이 이주를 가속화했다. 또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시기의 정치적 변화도 이주를 더욱 부추겼다. 이때 한국에 온 화교 중 중국요리업에 종사하는 인물은 대개 사망했는데, 몇몇 생존한 인사도 있다. 인천 신흥동 ‘신일반점’의 노(老)주방장 임서약 선생(84)도 그 중 한 명이다.

 

첨면장·첨장·총장… 춘장의 역사 되짚어보니

임서약 선생은 10대 후반 한국에 건너와 잡화상 직원으로 일하다가 요리를 배워 당시 화교가 많이 살던 인천에 자리를 잡는다. 그는 나와 인터뷰하는 당일에도 만두를 재빠르게 빚는 등 기본 요리를 할 정도로 정정했다. 당시 그는 “미군이 버린 드럼통을 개조해 만든 화덕에 호떡을 구워 팔면서 음식에 뛰어들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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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선생은 웍(중국식 솥)과 국자를 잡고 60여 년을 일했고, 아직도 전통적인 짜장면 맛을 잊지 못한다. 그에 따르면 초기 중국요릿집의 짜장면은 형태와 맛이 지금과 많이 달랐다. 변화가 가장 극적인 건 장(醬)이다. 산둥은 장의 기본이 되는 콩도 많이 나지만, 밀가루가 특히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된장 소비가 많았다. 이 장을 첨면장, 또는 첨장이라고 불렀다. 밀가루를 넣어 달콤한 맛이 강하고 노란색을 띠는, 부드러운 장이다. 한국 된장보다 일본식 시로미소(백된장)에 가깝다. 밀가루를 넣어 색감이 밝고 한국 장과 달리 속성으로 발효한다. 이 장을 오랫동안 직접 담가서 짜장면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장을 현재는 ‘춘장’이라고 부른다. 혹자는 춘장이 첨면장에서 첨장으로, 첨장이 다시 춘장으로 진화했다고 말한다. 산둥에서 이 장에 파(葱)를 찍어 먹었는데 당시 불리던 ‘총장(葱醬)’이 와전돼 ‘춘장’으로 불리게 됐다는 얘기도 있다.

임 선생은 직접 만들어 쓰던 장을 포기하게 된 이유로 당시 위생 검역과 한국인 운영 중국집 급증을 들었다. 담근 된장은 위생법 기준으로 검사하면 항상 문제가 발생했고, 그 틈에 공장 생산품이 크게 공급되며 자연스레 세대교체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또 춘장을 담그는 법을 모르거나, 굳이 담가야 할 민족적 태도가 없는 한국인이 중국집을 많이 열면서 변화된 풍조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어찌 됐든 그 춘장은 나중에 캐러멜 색소를 넣어 검게 변하고 단맛이 더 강해져 전국을 평정하고 있다.

 

인천부두 바라보며 ‘짜장면의 역사’ 떠올리다

다시 차이나타운. 패루를 지나 차이나타운을 돈 후 중구청 쪽으로 걸으면 의미심장한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이 바로 청과 일본의 조계지를 나누는 경계선이다. 이 계단 위에 서면 가까이 인천 부두가 보인다. 화물선이 부지런히 드나든다. 1882년 이후,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조선의 운명이 저 바다에 있었다. 최초의 짜장면 재료와 중국인들을 실은 배가 들어오던 바다다.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by 박찬일

셰프 (삼성전자 에세이 필진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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