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보고 싶은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201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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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에 보고 싶은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창작의 여정에서 길을 잃고 헤매더라도 계속해서 걸을 수만 있다면

 

잃다 그리고 얻다@일본, 각무원 

뉴스룸의 ‘잡상인(雜想人)’입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월드컵이 열렸던 해 겨울, 2주 일정으로 일본 혼슈 지방 기후현에 있는 각무원이란 곳엘 갔습니다. 체류 기간 내내 빡빡한 일정 탓에 셔틀버스 편으로 숙소와 근무지만 오가다보니 숙소 주변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 채 어느덧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됐습니다. 당시 머문 곳은 엇비슷하게 생긴 고택으로 가득한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 일과를 마친 후 ‘언제 또 여길 와보겠느냐’는 생각에 걸어서 근처를 한번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어스름해질 무렵, 숙소를 나섰습니다. 공기는 차갑고 쓸쓸했습니다. 고즈넉했던 골목길의 성별은 여성인 듯 고요하고 기품 있는 정취로 가득했습니다. 적요(寂寥)함에 대해 현재 제가 품고 있는 인상이 있다면 그날 오후 그곳에서 얻은 겁니다.

길고 좁고 복잡한 골목길을 지나는데 저녁 빛이 하나둘 떨어졌습니다. 겨울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빨리 하늘이 먹물 빛깔 머리채를 풀어 헤쳤습니다. 거리는 금세 어둑해졌고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은 암흑처럼 깜깜해졌습니다. 혼자 걷는 길의 침묵 속에 너무 멀리까지 걸어 나온 탓인지 ‘모태 길치’인 전 그만 되돌아갈 길을 잃었습니다.

당황해서 숙소를 찾아 미로 같은 길을 헤매는데 여기가 저기 같고 저곳이 이곳 같아 도무지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구불구불 휘어진 저편에 뭔가 휘익, 하고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면 우에노 주리와 에이타가 출연한 영화 ‘서머 타임머신 블루스’에 나왔던 일본 민담 속 요괴 ‘갓파’라도 나타나 “쿠~” 라고 할 것만 같아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애니매이션 '갓파쿠와 여름방학을'과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포스터 사진입니다.(출처) 메가박스, 인디스토리/출처가 명기된 이미지는 무단 게재, 재배포할 수 없습니다

“침착하자.” 호흡을 가다듬고 밤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거대한 검은 강이 머리 위에서 소리 없이 흘러갔습니다. 촘촘하게 내려앉은 어둠 위로 별들이 소금 알갱이처럼 하얗게 빛났습니다. 공기가 맑아서인지 겨울 밤하늘 황소자리에 속한 좀생이별이 총총했습니다. (전경린 작가의 단편 제목이기도 한) ‘국제어두운밤하늘협회’ 회원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후 어찌어찌 해서 숙소로 돌아온 과정은 오늘 제가 하려던 얘기가 아니니 이만 줄입니다(다음 번에라도 들려드릴 기회가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한참을 걷다가 겨우 되돌아 온 전 피곤한 탓인지 오랜만에 깊고 편안한 단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한국으로 돌아오는 귀국편, 전 구름 위에 앉아 ‘어떤 생각’을 했습니다. 한참을 잊고 지낸, 일본 소도시 작은 동네 골목에서 길을 잃었던 것과 연관된 기억의 한 다발이 13년이 지난 지금 불현듯 떠오른 건 올 6월 개봉한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지난 주말 뒤늦게 봤기 때문입니다. 

한 여성이 길을 걸어가는 뒷 모습입니다.(출처) 인디스토리/출처가 명기된 이미지는 무단 게재, 재배포할 수 없습니다

 

구하다 그래서 찾다@일본, 고조 

흑백으로 촬영된 1부에서 영화감독인 태훈은 촬영 헌팅 겸 사전 취재를 위해 찾은 일본 나라현의 소도시 고조에서 숙소 근처 산책을 나왔다가 길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우연히 자전거를 탄 소녀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태훈은 그다음 날 겐지에게서 자신의 첫사랑인 요시코에 대한 얘길 듣기 전이므로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등장한 요시코는 영화 내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총 몇 번인지는 영화를 보시게 되면 한번 세어보세요. 힌트를 드리자면 인디밴드 ‘만쥬한봉지’와 ‘정흠밴드’ 멤버 숫자를 더한 것과 같습니다.) 이후 2부에선 유스케와 혜정의 얘기가 색동옷을 입고 펼쳐집니다.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계속해서 걷고, 바라보고, 대화하는 모습이 서로를 알아가는 여정이라는 의미에서의 ‘로드무비(road movie)’라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나라국제영화제 프로젝트 일환으로 꽤 빠듯한 일정 속에 제작된 것으로 들었는데 오히려 그런 제약이 창작엔 긍정적으로 발현된 듯했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나 말투가 마음에 들면 특별한 내용이 없더라도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계속 귀를 기울이게 되듯이 저는 영화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마지막 하나-비(Hana-bi) 장면에선 제 머리 속에 ‘불꽃놀이의 향연’이 펼쳐지는 듯했습니다. ‘세상물정의 물리학’(동아시아)이란 책에 나오는 이런 구절처럼 말이죠. “별빛이 얼마나 먼 거리를 달려왔는지 아는 것은 그 엄청난 거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움을 제공한다. 그렇게 먼 거리를 달려온 빛이 (중략) 전달돼 내 머릿속 수많은 신경세포가 멋지게 발화해 ‘불꽃놀이’의 향연을 만드는지 아는 것은 정말 멋지고 경이로운 일이다.” 

밤 하늘에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모습입니다.(출처) 인디스토리/출처가 명기된 이미지는 무단 게재, 재배포할 수 없습니다

영화 내 삽입된 멜로디도 귀에 쏙쏙 스며들었습니다. 보는 내내 어떤 음악이 생각났습니다. 당김음(syncopation)이 곳곳에 안배돼 있어 머릿속에 음표가 그려지고 자연스레 악보가 떠올랐습니다. 

일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가 인터뷰에서 “영화란 무엇인가?” 묻는 질문에 대해 “우리 강아지는 이상하다. 어떨 땐 여우 같고 어떨 땐 너구리 같고 어떨 땐 곰 같고 어떨 땐 돼지 같다. 그런데 우리 강아지는 개다.”(잡지 ‘악스트<Axt>’ 재인용)라고 답변한 일화를 최근에 읽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영화는 때론 음악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또 어떨 땐 한 폭의 그림이나 사진같이 보이고 다른 한편으론 소설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결국은 ‘영화’인 거죠.

저 역시 매일 뉴스룸을 통해 세상에 내보낼 새로운 콘텐츠를 준비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입장이기에 영화 속에 묘사된 창작자의 고민과 그 과정에서 나온 결과가 나란히 구현된 모습에 깊은 공감이 갔습니다. 또, 한계가 명확한 시간과 의도하지 않음으로 가득한 공간을 즉흥 연주 같은 연출과 연기로 채워가는 모습에 긴장감과 짜릿함을 느꼈습니다.

 

계속해서 걷다@대한민국, 서울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날 저녁, 방배동 사잇길 초입에 있는 메밀소바집 ‘스바루’에 들렀습니다. 현관문에 쓰여진 ‘昴’란 상호의 뜻에 대해 식탁 위에 놓인 메뉴판은 초겨울의 대표적 별자리인 황소자리에 속한 작은 성단(星團)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우리나라에선 묘성(昴星), 좀생이별이라고 부르는 별들의 모임입니다. 

영화를 별점으로 평가하는 걸 썩 좋아하진 않지만 ‘한여름의 판타지아’에 별점을 준다면 몇 개일까?’ 자문해봅니다. 처음엔 다섯 개 만점에 네 개 하고도 반을 더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밤하늘에 반 개짜리 별은 없으니 그냥 다섯 개를 모두 주렵니다. 이렇게(★★★★★) 말이죠.

겨울이 시작되면 점점 어떤 벽에 가까워져 감을 느끼게 됩니다. 멀리서부터 한참을 걸어왔는데 도착한 곳이 거대한 벽 앞이라면 대략 난감하겠죠. 하지만 그래도 계속 걸어가야만 합니다. 돌아오는 주말엔 북촌에 한번 가보려 합니다. 북촌의 오래된 골목 깊숙한 곳을 걷고 싶네요. 창덕궁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바라볼 겨울 밤하늘이 무척이나 아름다울 것입니다. 어쩌면 정말 운이 좋다면 좀생이별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골목길 사진과 해가 지는 노을 사진입니다.

추신1.
‘혹시라도’ 제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구름 위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신 분은 맨 위로 되짚어 올라가 이 글 제목 밑에 붙은 문장을 보세요

추신2.
“영화란 지루한 부분이 커트된 인생이다”란 말도 있지만 때론 남루하고 지리멸렬해 보이지만 잘려지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담은 영화가 깊숙이 들어오는 날이 있죠.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좋아하신 분이라면 분명 좋아하실 만한 영화 몇 편을 추천해봅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 모두 복 받으실 겁니다. 뉴스룸의 ‘잡상인(雜想人)’ 이만 물러갑니다. 또 찾아뵙겠습니다

영화 '혜화,동', '걸어도 걸어도', '인어베러월드',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의 포스터입니다. (출처) 인디스토리, 영화사 진진, AT9㈜씨에이엔/출처가 명기된 이미지는 무단 게재, 재배포할 수 없습니다

※본 콘텐츠에 포함된 영화 포스터는 인용 목적으로 사용됐으며 저작권은 각 제작사(社)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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