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3D프린팅’ 기술과 시장의 탄생을 기다리며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이 발행하는 격월간 잡지 ‘MIT 테크놀로지 리뷰’는 매년 ‘10대 혁신 기술(10 Breakthrough Technologies)’을 선정, 발표한다. 올 2월 발표된 2018년 편에선 그 첫 번째 기술로 ‘금속3D프린팅(metal 3D printing)’이 선정됐다(참고로 함께 언급된 기술은 인공지능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금속3D프린팅은 원래 디자인 검증용 시제품 제작 기술로 널리 쓰였지만[1] 오늘날은 “충분히 크고” “매우 복잡하며” “(항공기 제조에 사용될 정도의) 신뢰성과 내구성을 갖춘” 금속 부품을 만들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머지않아 제품 양산을 목적으로 조성된 생산 시설이 3D프린터로 인해 단순화되고, 물류 센터까지 갖춘 대형 공업 단지가 분산형 연구∙생산 복합 시설로 바뀔 거란 예측도 있다. 기사만 읽으면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정말 코앞으로 다가왔구나, 싶다.
흥미로운 대목도 있었다. 기사에 소개된 금속3D프린팅의 ‘키플레이어(key player)’는 전부 미국 회사였다. 그중 두 곳은 MIT 졸업생과 교수가 세운 스타트업이었다. 4차 산업혁명을 준비 중인 우리나라가 예의주시해야 할 대목이다.
산업계에선 3D프린팅 시장을 장비와 소재, 소프트웨어(관련 서비스 포함) 등 크게 세 부문(sector)으로 나눈다. 장비와 소재를 하드웨어로 묶으면 하드웨어가 한 축, 소프트웨어가 다른 한 축이 된다. 하지만 3D프린팅 시장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이런 구분이 편협한 시각의 산물이란 사실을 금세 알 수 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기술의 사업적 가치보다 기술이 만들어낼 ‘보이지 않는 부가가치’란 게 내 생각이다. 3D프린터 시장은 그 자체 규모보다 기기 활용에 따라 새롭게 창출되는 규모가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가치공학적으로도 입증된 3D프린팅의 시장성
특정 재화나 서비스의 가치를 분석할 때 가장 기본적인 접근 공식은 다음과 같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사가 고안한 가치 분석 방법이기도 한 이 공식을 풀어 쓰면 가치는 ‘재화나 서비스의 전 주기에서 얻는 질적 수준(품질) 대비 지불 비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질적 수준은 최종 결과물뿐 아니라 과정까지 아우르며, 비용 또한 단순히 지불된 돈뿐 아니라 소비된 에너지·시간·인력 등을 포함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 방식으로 3D프린팅 기술의 가치를 판단하면 어떻게 될까?
3D프린팅의 시장 가치를 입증하려면 기존 방식과 비교했을 때 시간(혹은 비용)을 줄여주거나 성능(혹은 품질)이 월등해야 한다. 편의상 전자를 A, 후자를 B라고 하자. 먼저 A의 경우부터. 제품 개발 과정에서 시제품을 만들 때 3D프린팅 기술을 활용하면 개발 전체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어느 정도 절감할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기업이 3D프린터를 이렇게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 컴퓨터 시뮬레이션 기술 발전까지 더해지며 제품 개발 주기는 날로 단축되는 추세다.
다품종 소량 생산 제품이나 맞춤형 제품을 만들 때에도 3D프린팅 기술을 활용하면 양산 공정 개발과 금형 제작에 드는 시간과 노력,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대표적 분야가 의료 기구. 두개골 부분 이식이나 치아 교정 등 꽤 많은 사례가 국내외에서 보고되고 있다. 특히 치아 교정의 경우, 2000년대 중반 미국 얼라인테크놀로지(Align Technology)사가 3D프린팅 기술 활용 맞춤형 투명 교정 장치 브랜드 ‘인비절라인(Invisalign)’을 선보이며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2016년엔 미국의 한 대학생이 3D프린팅 기술을 활용, 단돈 60달러로 투명 교정기를 만들어 셀프(self) 교정에 성공한 동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되며 주목 받기도 했다.
다음은 B에 해당하는 사례들. 항공우주∙에너지 분야에서, 특히 난가공성(難加工性) 특수 소재를 활용한 기능성(혹은 경량화) 설계가 필요한 상황에서 3D프린팅 기술은 꽤 유용하다(항공기 부품을 가볍게 만들고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3D프린팅 기술을 활용 중인 글로벌 기업 사례는 지난 회차 칼럼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록히드마틴(Lockheed Martine)이나 노스롭그루만(Northrop Grumman) 같은 미국 군수업체는 차세대 전투기 제작에 금속 3D프린팅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국내 도입이 예정된 F35[2] 부품에도 3D프린팅 기술이 적용된 걸로 알려졌다. 이들 기업은 요구되는 성능을 갖춘 부품을 개발하기 위해 3D프린팅용 합금 소재 기술을 개발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가장 좋은 건 A·B 두 경우가 공존하며 혁신적 가치를 이뤄내는 상황일 것이다(앞선 공식에 따르면 분모<비용>는 작아지고 분자<품질>는 커지는 셈이 되니 가치 상승 폭은 더 가팔라진다).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서라도 (Design For Additive Manufacturing)의 효율적 활용은 반드시 필요하다(DFAM 개념은 역시 이전 회차 칼럼에서 자세히 다뤘다).
GM, 3D프린터로 신차 14종 무게 160㎏ 줄여
얼마 전 3D프린터 도입으로 비용을 절감한 미국 제너럴모터스(GM)사 공장 사례가 보도된 적이 있다. 기사에 따르면 3만5000달러(약 4000만 원)짜리 3D프린터 한 대를 구매, 제조 공정에 활용한 이 공장은 2년간 30만 달러(약 3억4000만 원) 이상을 아꼈다. 프린터 한 대 가격치곤 결코 낮지 않지만 자동차 양산 공정에 쓰이는 장비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그리 비싼 것도 아니다.
기사를 좀 더 꼼꼼히 읽어보니 그 3D프린터는 자동차 부품을 직접 만드는 데 쓰인 게 아니라 자동차 조립 공정 시 소모품으로 사용되는 소형 부품 제작에 활용된 거였다. 다시 말해 3D프린터 한 대가 자동차 조립 공정에 약간의 변화를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투입 비용의 10배에 해당하는 ‘가치’ 창출에 성공한 것이다.
그뿐 아니다. GM은 오토데스크[3]와 손잡고 자동차 섀시 등 주요 부품의 강성(剛性)은 유지하면서 가볍게 설계하는 데 DFAM 기술을 적극 활용해왔다. 최근 10년간 GM이 도입한 3D프린터는 50대 이상. 이들 기기를 활용, 시제품을 생산∙점검한 신차는 25만 대가 넘는다. 이 같은 노력 덕에 GM은 2016년 이후 출시된 신차 14종의 평균 차체 무게를 약 160㎏ 줄였다. 3D프린터 활용으로 타사보다 더 많이, 더 빨리 설계를 검증하고 그 결과를 실제 제품에 적용해 안전성을 점검한 덕분이다.
GE의 3D프린팅 경쟁력이 놀랍고 무서운 이유
GE 사례는 이 칼럼 연재를 시작한 후 여러 차례 언급했었다. GE는 항공기용 엔진과 발전기용 부품 등 특수 분야 제품의 설계, 생산에 3D프린팅을 활용해왔다. 그러다 재작년 독일과 스웨덴에서 금속 3D프린팅 업체를 잇따라 인수, 합병했고 사내에 3D프린팅 사업 전담 부서 ‘GE 어디티브(GE Additive)’를 출범시키기에 이르렀다. 요즘은 3D프린터로 항공기용 부품을 만드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3D프린터를 직접 만들기도 한다. 3D프린터를 활용한 제품 개발·양산 대행 서비스 사업을 펼치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특수 금속 소재도 자체적으로 개발, 판매하고 있다.
요컨대 GE는 앞서 언급한 3D프린팅 기술의 세 부문, 즉 장비·소재·소프트웨어를 모두 취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응용 분야에 대해서도 전 주기적 가치 창출이 가능한 구조를 갖췄다. 단순히 3D프린팅 장비만 취급하거나 3D프린팅 제품 제작 서비스만 대행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이익의 몇 곱절을 얻을 수 있는 시장 지배력을 확보한 것이다. ‘항공기 부품을 생산하고 부품 제조에 필요한 3D프린터를 만들며 그 노하우를 사업화하는’ GE는 놀라운 동시에 무섭기도 한 존재가 돼가고 있다. 3D프린팅 기술을 중심으로 연쇄적 가치를 끊임없이 창출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우주항공 외에 다른 분야로 사업을 확장할 때에도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사실 3D프린팅 기술 활용(과 그로 인한 가치 창출) 사례는 국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기업 입장에선 그 모든 게 자체 노하우인 만큼 외부 공개를 꺼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당장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것들만 해도 그 수가 적지 않다. ‘설마 이런 것까지 될까?’ 싶은 응용 분야, 이를테면 고온∙고압의 극한 환경에서 사용되는 부품 관련 기술 개발에 도전해 성공한 사례도 여럿 존재한다. ‘3D프린팅 선진국’ 미국만큼은 아니겠지만 국내 기술 수준도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미래가 인류에 희망적일지, 위협적일지 현재로선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혁명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든 그 모습은 오늘날 인류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다. 3D프린팅 기술도 마찬가지다. 3D프린팅이 바꿔놓을, 다소 생소할 산업 환경에선 전에 없이 새로운 가치의 먹이사슬이 만들어질 전망이다. 인공지능 기술이 가까운 미래에 산업 기술과 경제 균형의 지도를 바꾸리란 건 이제 누구나 다 안다. 동일한 논리로 3D프린팅 기술은 생산과 물류 지도를 바꿔놓을 게 분명하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우리 산업 환경에 적합한 ‘한국형 3D프린팅’ 기술(과 시장)을 갖추려는 노력일 것이다.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1] 이런 용도에서의 명칭은 ‘쾌속조형(rapid prototyping)’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2] 공군∙해군∙해병대에서 사용되는 항공기 기능을 하나의 기종으로 통합한 지상공격용 전투기. JSF(Joint Strike Fighter)라고도 불린다. 미국 주도로 개발됐으며 록히드마틴과 보잉이 참여했다
[3] Autodesk. 2∙3차원 디자인 소프트웨어 개발 전문 기업으로 오토캐드∙3D스튜디오 등이 대표작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州)에 본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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