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기 짝이 없는 우리 가족에게도 특별한 비밀이 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우리 가족에게도 한 가지, 특별한 비밀이 있다.
그건 바로, 한 해가 끝나 갈 무렵 다음 해를 위한 특별한 달력을 만든다는 것.
시작은 재작년 겨울 무렵이었다.
엄마가 낡은 사진 한 장을 가지고 내 방으로 들어오셨다. 오래되어 부분 부분 벗겨진 흑백 사진 속에는 아빠가 열 한살 되던 해 돌아가셨다던 할아버지의 학생 시절 앳된 얼굴이 있었다. 한 번도 뵙지 못했지만 아빠와 닮은 그 얼굴이, 참 그립고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사진을 스캔해 조심스레 사진 속 얼룩을 지우고 부분 부분 보정을 해서 인화를 맡겼다. 그리고 며칠 뒤, 깔끔하게 인화된 사진을 보신 아빠와 할머니는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시더니 예쁜 액자에 담아 거실 한 켠에 걸어두셨다.
늘 아이디어가 넘치시는 울 엄마, 그 사진을 보시더니 한 가지 의견을 내셨다.
“우리, 이렇게 옛날 사진들을 스캔해서 달력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요즘 앨범은 잘 보지도 않잖아.
그리고 모임 있을 때마다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 찍은 것도 좀 넣고…”
때 마침 연말에 가족 행사가 있어 그 날 가족들에게 달력을 선물하기로 하고, 엄마와 나는 한 달간 부지런히 움직였다. 가족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생일을 묻고, 각 달마다 제사와 기념일들을 정리하고 앨범을 뒤져 달력에 쓰일 사진들을 추려 냈다.
“엄마, 이 사진은 어때요?”
“그거 네가 왜 울고 있는지 아니? 네가 오빠 때문에 골이 나서 ……”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그 풍경이 어느새 눈 앞에 떠올라 엄마와 한참 동안 깔깔거렸다.
추려진 사진들은 각 달의 컨셉에 맞게 재 배열해서 마침내 달력이 완성 되었다.
그리고 달력이 도착하던 날, 첫 페이지를 장식한 아빠 삼 형제의 사진을 보신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내 손을 꼭 잡으셨다.
“이 사진, 너네 할아버지가 찍어 준 사진인데.. 이게 여기 이렇게 있네.. 고맙다. 참말 고맙다.”
벌써 몇 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나신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시는 할머니의 두 손을 어루만지며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참았다.
가족 모임에서 달력을 받아 든 가족들은 때론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미소를 짓기도 하며, 바쁜 삶 속에 겹겹이 담아 두었던 추억을 다시 꺼내 화두에 올렸다.
“그 때, 그래서 네가 소 여물통을 가지고 뗏목을 만들겠다고 끌고 나갔다 어머니한테 맞았잖아!”
“아이고, 형님 그게 언제적 이야기인데..”
그리고 올 해로 두 돌이 된 가족 달력은, 내 결혼식과 겹쳐 더디게 만들어졌지만 작년과는 또 다른 멋진 선물을 우리 가족에게 가져다 주었다.
설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설 선물을 보내고 엄마께 연락을 드렸는데 여느 때와 달리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셨다.
“쏭아~ 그런데 엄마 라디오 방송 탔다! 방금 거래처에 들렀다가 차에 탔는데 엄마 이름이 나오더라고”
부모님은 일산에서 문구류 관련 작은 도매업을 하시는데,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되는 출근 시간 동안 늘 양희은, 강석우씨가 진행하는 여성시대를 들으셨다. 엄마는 어렵사리 완성된 두 번째 가족 달력을 받아 들고 기쁜 마음에 인터넷으로 사연을 올리셨는데, 그게 당첨이 된 것 같다는 거다.
하필이면 거래처에 들어갔다 나온 사이 엄마의 사연이 방송을 탔고,
1,2부 마지막 순서에 사연 당첨자에게 보내는 선물을 말해주는데 엄마의 이름이 언급되었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 날의 방송 내용을 다시 들어보니, 다름 아닌 우리 가족 달력에 관한 내용이었다.
▲ 라디오 사연 다시 듣기
11대 종손의 맏 며느리로 31년을 살아오신 엄마.
우리 집에 있어서 그 달력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보라는 엄마의 고백에, 그 누구보다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져 마음이 짠했다.
그 다음날, 나는 개인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에 엄마의 라디오 사연과 우리 가족의 특별한 달력에 대한 포스팅을 올렸다.
계절이 바뀌어 따뜻한 봄 바람이 불어 올 무렵, 아래와 같은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저희 5월호에 이라는 특집 기사가 있어요. 특별한 가족사진을 가지신 분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랍니다.
가족의 소중함이 잊혀지고 있는 지금 가족사진을 보면서 의미를 되새기자는 의미인데요. 제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인터넷에 올려 주신 재미난 달력을 봐서요^^
괜찮으시다면 그 멋진 달력 좀 공유해주세요.
간단한 촬영과 인터뷰면 됩니다.
확인하시게 되면 연락 부탁 드릴게요.
예상치 못한 메일에 처음엔 적잖이 당황한 나머지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 가족에게 색다른 추억이 될 것 같아서 용기를 내 적혀진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다.
기자분과 문자를 주고 받으며 인터뷰 날짜를 정하고 엄마께 연락을 드렸다.
역시나.. 뛸 듯이 기뻐하시며 흔쾌히 엄마 집에서 촬영을 허락해주셨다.
그리고 인터뷰 당일, 교대 근무를 마치고 잠든 신랑을 두고 집을 나섰다.
친정 집에 도착하니 오빠네 내외와 촬영 기사님, 기자분이 벌써 도착해 계셨다.
간단하게 인터뷰를 하고 바로 사진 촬영에 들어갔다.
가족들이 평소에도 잘 웃는 편이라 금방 끝날 것 같았는데 거짓말 안 보태고 100장 정도는 촬영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30분 정도 흘렀을까? 촬영 기사님과 기자분이 쏙닥쏙닥 촬영한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하더니 이제 인물 사진은 다 찍었으니 달력 사진만 몇 장 더 찍고 가겠다고 하셨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아빠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지고, 우리는 동그랗게 모여 앉아 달력을 보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보름 후, 잡지가 한 권 배송되어 왔다.
어떤 기사가 적혀졌을까? 어떤 사진이 나왔을까? 기대에 부풀어 잡지를 넘기는데…
정작 잡지에 실린 사진은 우리 가족이 무방비 상태로 달력 속 사진을 보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응? 아니 그 많은 사진들은 어쩌고..
“어째 촬영도 안한 전 서방이 제일 크게 나온 것 같네!”
엄마가 농담 삼아 한 마디 하셨다.
그래도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어찌나 자랑을 하셨는지,
빳빳하던 잡지는 어느새 그 페이지만 너덜너덜해졌다.
라디오 사연에 이어 여성 잡지에까지 실린 울 엄마,
하고 계신 일도 올 해는 어쩐지 술술 잘 풀리신다고 하시던데..
아무래도 우리 집 달력이 나보다, 오빠보다 더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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