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독립정신답사단의 뜻깊은 동행 [2편]
두둥, 드디어 중국 대련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한국에서 10시 비행기로 출발했지만 중국에 도착한 시간은 9시 55분!
중국은 우리나라보다 정확히 1시간 느린 시간을 표준시간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1시간의 비행을 했지만 시간은 다시 오전 10시!
외국 나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나라마다 다른 표준시간은 어릴 때부터 상상하던 시간아 멈추어 다오~ 혹은 타임머신 타고 뿅~ 하고 이동하는 느낌이에요 (너무 촌스러운가요? 사실인걸요 ㅠㅠ)
여러분의 추천 한방이 저희에겐 큰 힘이 됩니다 ^^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반겨준 건, 6박 7일의 일정 중 3일을 함께할 조선족 가이드 분들과 하루 평균 10시간 정도 타고 다닐 중국의 버스였답니다. 1편 지도에서 보여 드렸다시피 답사단의 일정은 숙소에서 자는 시간보다 버스에서 자는 시간이 더 많았는데요. 처음엔 불편한 버스 의자와 온몸에 전해지는 버스의 흔들림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던 학생들이 시간이 지나자 버스에 앉기만 하면 잠에 들었죠.
답사단의 첫날 일정은 대련공항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여순으로 이동해 여순감옥과 관동대법원을 둘러보는 것이었는데요. 중국에서는 옆 동네에 놀러 간다 하면, 보통 1~2시간 이동은 기본! 조금 멀리 이동한다는 개념이 4~5시간 정도라고 해요. 중국이 얼마나 큰 나라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죠.
대련공항에서 여순으로 이동하는 동안 조선족 가이드 분이 대련과 여순에 대해 아주 자세히 설명해주셨답니다.
여기서 잠깐!
대련과 여순은 러시아가 동북아시아와 태평양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근대적으로 개발을 시도한 도시다. 1904년~1905년의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이후에 이곳은 일본의 지배권역에 포함되어 관동주라 명명되었다. 이후 여순과 대련에는 관동군사령부, 남만주 철도주식회사, 일본 해군기지, 동양척식주식회사 대련지점, 조선은행 대련지점 등이 들어서며 일본제국주의의 만주 침략에 필요한 핵심기관이 모여있는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여순은 대련에서 47km 떨어져 있어 자동차로 약 1시간 가량 소요되며 중국의 해군기지가 있는 미개방지입니다. 이곳에는 안중근, 신채호가 숨진 여순감옥이 있습니다. 안중군이 감옥살이를 한 감방과 일제에 의해 처형 당했던 건물, 그리고 신채호가 병들어 사망한 의무계 건물이 있죠. 또한 안중근이 이토를 포살하고 사형 판결을 받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건물도 있습니다.
대련과 여순에 대한 기본 정보 숙지 하셨나요?
그럼 이제 독립투사들에 대한 묵념 한번 하고~ 여순감옥과 여순고등법원에서 그분들의 숨결을 느껴볼게요!
애국지사의 얼을 느끼다
위에 사진에 보이는 곳이 바로 여순감옥이에요.
감옥이라고 하기엔 겉모습이 너무 멋스럽고 현대적이라 조금 놀랬지요. 하지만 저 안으로 들어가면 안중근 의사가 구금되었던 감방과 처형 당한 사형장까지 무시무시한 것들이 숨어 있었어요. 여순감옥에는 안중근 의사 뿐만이 아니라 700여 명의 항일열사가 투옥되었던 곳이지요.
건물은 회색 벽돌과 빨간 벽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요, 본래는 회색 건물로 러시아군이 지었던 병원 건물을 일본군이 여순을 점령한 후 증축하여 개조한 감옥이에요. 다시 말하면 회색 벽돌 부분은 본래 러시아군이 지었던 건물이고, 빨간 벽돌은 일본군이 개조할 때 쌓아 올린 것이죠.
이 감옥의 면적은 약 26,000㎡로 2천여 명을 수감할 수 있는 큰 규모인데요 이 감옥에 수감되었던 사람은 대부분 항일 운동을 하였던 조선인과 중국인. 그리고 공산주의 활동을 하였던 중국인이었어요. 그래서 1971년부터는 역사전시관으로 바뀌어서 관리되고 있어요.
위의 사진은 감옥의 감시탑인데요. 혹시 이상한 점 발견하셨나요?
여순 감옥의 감시탑에는 올라가는 사다리가 따로 없었어요. 보초병들이 근무 교대를 할 때마다 사다리를 가져와서 올라가고 내려온 사람이 다시 사다리를 가져갔기 때문이라고 해요. 구금된 죄수들을 감독하기 위해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죠.
우리 독립열사들은 단지 조국의 독립을 꿈꿨다는 이유로 하루하루를 상상할 수도 없는 고문을 당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 독립을 간절히 소망하며 투쟁하고 이곳에서 죽어갔습니다.
여순 감옥에서 5분 정도 이동하면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포살하고 사형 판결을 받은 관동대법원 건물이 있어요.
바로 이 자리에서 안중근 의사가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요. 죽음 앞에서도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개인 자격이 아닌 대한의군 사령관으로서 처형하였다.”고 당당히 밝힌 뒤 사형을 선고 받았고, 항소를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하셨죠.
관동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에서 사형 당했습니다.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하지만, 여순감옥 뒷산에 묻힌 그의 유해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습니다.
웃으면서 들어갔던 첫 답사지,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답사단원들을 숙연해 질 수 밖에 없었는데요. 온갖 고문과 고초를 받으면서도 일본군에게 투항하고 우리 민족의 정신을 잃지 않으려 고군분투했을 독립투사들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첫날 일정을 마치고 첫날 밤을 지낼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삼성스토리텔러 정연은 가슴이 자꾸만 답답하고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역사에 너무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반성이었을까요, 아니면 제가 살고 있는 독립된 대한민국을 만들어 준 독립투사 분들에 대한 고마움 때문일까요. 막연히 따라갔던 답사에서 어쩌면 7일 뒤엔 생각보다 더 많은걸 얻고 생각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것 같다는 좋은 예감이 드는데요?^^
다음 편에선 중국의 대자연! 말 그대로 입이 떡~ 벌어지는 천연 그대로의 자연을 보여 드릴게요!
3편도 기대해 주세요!
미래동행 > 사회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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