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나의 마지막 사업이 될것이다

2010/03/30
공유 레이어 열기/닫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블루미의 올드 다이어리-삼성전자 발자취적자, 경영악화, 한국반도체 인수1974년, 반도체 정보?no! n사 회장, 반도체가 뭐길래 내요청을 거절하노?, 회장 이병철
1974년 12월 6일, 삼성은 한국반도체의 50% 지분을 50만 달러에 인수한다.
나머지 50%의 지분은 미국의 소규모 벤처기업인ICII(Integrated Circuit Inc)가 그대로 보유하기로 했다. 한국반도체가 삼성과 ICII의 합작회사의 형태가 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사람이 이건희 동양방송 이사였다는 사실이다. 인수과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던 강진구 사장은 덕분에 숱한 질문공세에 시달려야 했고 안심시키느라 진땀을 빼야만 했다.

“삼성전자가 명색이 전자 메이커이니만큼 앞으로 반도체사업이 중요하다는 건 알겠지만 때가 이른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전자 부문이 고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투자할 여력도 없고 명분도 없는 이때 빚만 안고 있는 회사의 주식 50%를 50만 달러나주고 인수한 건 모험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구보다 전자사업을 잘 알고 있고 반도체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는 이건희 이사가 자신의 개인돈으로라도 인수하겠다며 지시를 내렸습니다. 비서실에서는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했다니 어쩔 수 없었겠죠.”

“회장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알고 계신 듯 합니다만 승인받진 못한 모양입니다. 아직 반도체사업에 대해 확신이 서질 못하신 것 같습니다.”

당시 미국과 일본에서는 컴퓨터와 반도체가 화두였다. 이건희 이사는 그 흐름을 주목했고 삼성전자 임직원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말을 자주했다.

“IBM을 분석해라. IBM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연구해라. IBM의 움직임을 주시하라. 반도체 시장의 판세를 거머쥐고 있는 IBM을 읽으면 반도체 사업의 맥을 짚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이건희 이사가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시기는 분명 예상 밖이었다. 전 세계가 오일 파동의 중간에 있었고, 재계와 전자업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출한 삼성전기와 삼성전관은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을 때였다. 이건희 이사는 이 점에 주목했다. 고전을 거듭하는 전자 부문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오직 반도체의 자급에 달려있다고 판단했고 이런 사정은 삼성전자 뿐 아니라 국내 전자업계, 공통의 숙제라 여겼다. 그런 까닭에 이건희 이사는 한국반도체 인수를 삼성전자의 미래 씨앗으로 삼았던 것이다.

“1973년 오일 쇼크에 충격을 받은 후, 한국은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하이테크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때마침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공장 설립 과정에서 파산에 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엇보다 ‘반도체’라는 이름에 끌렸다. 앞으로 진출해야 될 산업을 물색하면서 반도체사업을 염두에 두고 있던 중이었다. 시대조류가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넘어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그 중 핵심인 반도체사업이 우리민족의 재주와 특성에 딱 들어맞는 업종이라 생각하고 있었다.우리는 젓가락 문화권이어서 손재주가 좋고, 주거생활 자체가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등 청결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이런 문화는 반도체 생산에 아주 적합하다. 반도체 생산은 미세한 작업이 요구되고 먼지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되는 고도의 청정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공정이기 때문이다.”

반도체라는 씨앗은 결코 남에게 빼앗길 수 없는 종자였다. 이건희 이사의 이와 같은 결정은 좀처럼 하기  어려운 과감한 선행투자였고, 결과적으로 이 씨앗은, ‘반도체 신화’라는 열매를 맺게 될 튼실한 거목으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한국반도체는 전반적인 기술이 워낙 부족해 삼성전자가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부품을 만들 수준이 되지 못했다. 결국 삼성전자는 전자기기의 핵심 부품을 일본에서 구입해야 했고, 일본업체들은 부품이 없어 못주겠다거나 시세보다 비싼 값에 부품을 떠넘기는 등, 한국 전자산업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을 공략하며 마음껏 횡포를 일삼았다.
어처구니없는 횡포에 분개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당해야만 하는 기술 없는 자의 슬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반도체는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트랜지스터 생산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생산품목을 갖추지 못했고 사업을 확대할 자금조차 부족했다. 이렇듯 혼자 힘으로 버티기 힘들어진 반도체산업의 내실을 기하기 위해 삼성전자는 한국반도체를 흡수, 반도체사업부로 개편한다.

그러나 상황은 날로 악화되어 갔다. 삼성반도체의 가장 큰 약점은 자체 설계 부문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체 설계부문이 없다 보니 남이 개발해 놓은 제품을 따라갈 수밖에 없어 시장을 개척하기도 어려웠고, 값 또한 제대로 받질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삼성전자에 간신히 의지하고 있었지만 오래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은 삼성반도체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급기야 삼성반도체는 자본금을 모두 잠식한 채, 가까스로 부도의 위기를 넘기곤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삼성반도체 관리부장의 하루일과는 외줄이라도 타 듯 위태로움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퇴근 후 포장마차에서 쏟아 내는 관리부장의 푸념은 안쓰러울 정도였다.

“독자 기술로 개발된 제품이 없어 제값 받고 팔지도 못하고, 원진전자 수지공장과 대방동 조립공장을 인수 할 때 빌린 차입금의 이자를 갚기 위해 또 돈을 빌리고. 이러다 보니 자꾸 무리수가 나옵니다. 자금사정이 최악입니다. 날마다 돌아오는 어음을 막기 위해 위기를 넘긴 상황이 몇 번인지 모르겠네요. 은행가기가 두려울 지경입니다. 주거래 은행으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듣는 게 일과라니까요. 나 참.”

이미 삼성반도체는 그룹의 미운 오리로 낙인 찍혀있었다. 심지어 삼성반도체로 발령이 나면 회사를 퇴직하겠다는 직원들도 많았다. 모든 것이 악순환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이병철 회장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우수한 시설과 첨단 기술을 갖고도 부진을 면하지 못하는 이유는 경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 회장의 처방은 삼성보다 훨씬 앞서 반도체사업을 해 온 A사의 B회장에게 부천공장의 문제점을 지적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이 회장은 예전부터 B회장과 상당한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며칠 후, 이 회장의 부탁대로 A사의 과장급 엔지니어 너댓 명이 서울에 머물면서 부천공장을 샅샅이 둘러보고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이유에선지 입을 다물었다.

A사의 입장에서는 언젠가 삼성과 해외시장에서 부딪치거나 혹은 일본시장에 직접적으로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 날 이후 삼성은 반도체사업에 관한 한 A사는 물론이고 어떤 업체로부터든 단 한 톨의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이병철 회장은 친분관계가 두터웠던 A사의 B회장에게 다시금 반도체 기술을 요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만다. 그러나 B회장의 거절은, 역으로 삼성전자가 반도체사업을 진출하게끔 만든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자존심 상한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반도체가 뭐고? 반도체가 얼마나 중요하길래 B회장이 내 요구를 거절하노?”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반도체 반도체 반도체
단단히 화가 난 이병철 회장은 이때부터 반도체 삼매경에 빠져 지내기 시작했다.이병철 회장의 독특한 질문은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특유의 끈질긴 질문에 비서진은 물론이고 삼성의 임원 중 주눅 들지 않은 이가 없었다. ‘반도체가 뭐고?’로 시작된 이병철 회장의 질문은 ‘반도체가 모두 몇 가지고?’ 로 발전했다.

Semiconductor를 처음으로 반도체(半導體)라 번역했고 자신의 호를 반도(半道)라고 할 만큼 반도체에 열정을 갖고 있던 고따니 박사는 이병철 회장의 반도체 학습에 많은 도움을 준 인물이다.

“1978년 12월에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병철 회장을 처음 만났습니다. 처음엔 인사만 하고 나올 참이었는데, 반도체가 무엇인가로 시작해서 장래성이 있는가, 반도체사업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거의 2시간 동안 수많은 질문과 대답이 오갔습니다. 그때 이 회장은 반도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어요. 하지만 만날 때마다 질문이 깊어지는 것을 보고 이 회장이 반도체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병철 회장은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면서 반도체 전문가들을 수도 없이 만났다. 또한 국내에서도
전자산업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면서 다양한 의견을 들었는가 하면, 웨이퍼의 구조를 현미경으로 살피기도 하고, 크린 룸의 구조적 개선방안 등을 꼼꼼히 체크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이 회장은 반도체에 대한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읽을 수 있게 됐다. 특히 일본이 한국과 같이 오일쇼크를 겪으면서도 무역흑자 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했다.

결심했어!, 반도체 사업은 내 마지막 사업이자 삼성의 대들보가 될 사업이다.
1982년 4월, 이병철 회장은 보스턴대학에서 명예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다.
이건희 부회장도 함께 갔다. 학위 수여식이 끝난 후 이건희 부회장은 이병철 회장을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등지의 IBM, GE, HP등의 반도체 생산라인으로 안내했다. 미국의 반도체공장을 둘러 본 이병철 회장은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연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늦었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반도체사업을 해야 한다고 피력했던 이건희 부회장. 그의 꾸준한 설득은 마침내 미국 방문 길에서 받아들여졌고 이병철 회장의 결심은 귀국 후 확인됐다. 오랜 지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병철 회장은 이런 말을 빠뜨리지 않고 건넸기 때문이다.

“반도체사업은 나의 마지막 사업이자 삼성의 대들보가 될 사업입니다.”



by 삼성전자 블로그 운영자 블루미

 

제품뉴스 > 반도체

제품뉴스

삼성전자 뉴스룸의 직접 제작한 기사와 이미지는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성전자 뉴스룸이 제공받은 일부 기사와 이미지는 사용에 제한이 있습니다.
<삼성전자 뉴스룸 콘텐츠 이용에 대한 안내 바로가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