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적∙고성능∙저전력∙저비용 네 마리 토끼 잡는 게 저 같은 사람의 ‘미션’이죠” 삼성전자 최고 ‘낸드 플래시 메모리 회로설계 전문가’ 임정돈 마스터
▲여러 기업을 거쳐 2004년 9월 삼성전자에 입사한 임정돈 마스터는 “삼성전자의 최대 강점은 탄탄한 조직”이라며 “특히 나 같은 엔지니어가 자기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해주는 점이 가장 든든하다”고 말했다
“제가 담당하는 업무는 IO 기술 개발입니다. ‘IO’는 ‘인풋(Input)’과 ‘아웃풋(Output)’을 합친 용어죠. 쉽게 말해 메모리 셀(cell) 데이터를 외부와 통신하도록 하는 기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 말엔 다른 의미도 있어요. ‘재미(Interesting)’와 ‘탁월함(Outstanding)’을 뜻하는 영단어 머리글자를 합쳐도 ‘IO’가 되거든요. 흥미로우면서도 의미심장하죠?”
상대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이 대목에서 임정돈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 메모리사업부 플래시설계팀 마스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임정돈 마스터는 낸드(NAND) 플래시 메모리 분야에서 삼성전자가 초고속 회로 설계 기술을 확보하는 데 기여한 실력자. 낸드 플래시 메모리는 삼성전자가 지난 2013년 세계 최초로 3차원 V낸드를 개발, 업계 내에서 독보적 경쟁력을 구축한 영역이다. (삼성전자의 낸드 플래시 메모리 개발사 관련 내용은 지난해 1월 14일 발행된 ‘메모리 산업 30년사 빛낸 삼성 반도체 신화의 순간들’ 참조)
“탁월함은 즐겁게 일하지 않으면 생겨날 수 없어요. 월급 받고 하는 일, 무슨 재미가 있겠냐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같은 일을 해도 충분한 동기가 부여되고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면 얼마든지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과는 자연히 따라오게 마련이에요.” 시종일관 진지하던 그의 표정은 이 얘길 하며 밝고 환하게, 흡사 장난꾸러기의 그것처럼 바뀌었다. ‘탁월함과 재미의 공존은, 어쩌면 그의 업무가 아니라 그란 인물 자체에 관한 설명일 수도 있겠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삼성전자 나노시티 화성캠퍼스에 위치한 임정돈 마스터의 사무실 벽엔 ‘즐거움 속의 탁월함(Interesting&Outstanding)’이란 문구가 현판 형태로 걸려 있다. 그의 주된 업무인 ‘IO(Input&Output)’의 머리글자를 활용, 재치 있게 만든 슬로건이다
“즐거움 속에서 탁월함 추구하는 게 우리 팀 경쟁력”
임정돈 마스터에 따르면 반도체 제작 과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그는 이를 건축에 빗대어 설명했다. “우선 소자(素子∙element)를 만들어내는 ‘공정’이 있습니다. 건물 짓는 일에 비유하자면 벽돌이나 기와 따위를 굽는 것에 해당해요. 다음 단계는 공정을 거쳐 생성된 재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하는 ‘설계’입니다. 설계도면대로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의 완성도를 ‘검사’하는 단계가 마지막이에요. 이중 제 일은 중간 단계, 즉 설계 분야라고 할 수 있는데요. 소자를 이리저리 조합, 반도체가 의미 있는 동작을 할 수 있도록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죠. 이때 소자의 연결 정도나 상태에 따라 메모리∙중앙처리장치(CPU) 등 다양한 형태의 반도체가 탄생하게 됩니다.”
반도체 메모리 성능을 향상시키려면 세 가지에 집중해야 한다. △제한된 면적에 데이터 저장 셀을 더 많이 만들 수 있게 하는 '고집적(高集積)' 기술 △셀 데이터의 읽기·쓰기 속도를 높이는 '고성능' 기술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저전력' 기술이 그것. 오늘날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크게 D램과 낸드 플래시 등 두 분야로 나뉜다. 둘의 결정적 차이는 ‘데이터 저장 여부’에 있다. D램 메모리는 저장돼 있던 데이터가 전원을 끄자마자 소멸되는 특성 때문에 ‘휘발성 메모리’로 불린다. 반면, 낸드 플래시 메모리는 ‘비(非)휘발성 메모리’로 통한다. 전원을 꺼도 저장된 데이터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 D램 방식은 데이터 저장 성능이 취약한 대신 속도가 빠르고 용량 부담이 비교적 낮다. 낸드 플래시 방식은 반대로 용량이 크고 데이터를 계속 저장해야 하는 만큼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린 편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좋은 낸드 플래시 메모리는 용량이 크면서도 속도가 빠릅니다. 삼성전자 메모리가 업계 최고를 유지하는 비결 역시 ‘세계에서 가장 속도가 빠르면서도 초고용량화(化)에 유리한’ 수직 적층 기술을 다른 기업보다 한발 앞서 개발한 데 있습니다. 사실 메모리 속도를 높이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같은 양의 데이터를 같은 속도로 처리한다 해도 그 과정에서 소모되는 배터리가 얼마나 차이 나는가, 그게 중요하죠. 특히 스마트폰처럼 충전기에 잠깐 꽂았다 계속 갖고 다니며 쓰는 모바일 기기는 1회 충전으로 얼마나 오래 사용하는지가 사용 편의성 측면에서 최대 관건일 수밖에 없어요.”
▲임정돈 마스터는 “반도체 설계 엔지니어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면 매사 의문을 품는 자세, 그리고 오랜 공부를 통한 통찰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임정돈 마스터는 “반도체 메모리에서 용량이나 속도 못지않게 중요한 게 비용”이라고 강조했다. “반도체 설계 엔지니어 입장에서 볼 때 비용은 두 가지 측면에서 관련성을 지닙니다. 배터리를 적게 쓰고 속도를 내면 비용도 낮출 수 있죠. 그런 방식으로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게 핵심 중 하나예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생산 단가는 최대한 절감해야 합니다. 동일한 성능의 기계를 만든다 해도 칩 하나 만드는 데 A사는 100만 원을, B사는 10만 원을 각각 쓴다면 더 큰 이윤을 남기는 건 B사일 겁니다. 실제로 저 역시 면적이나 소자 개수, 전류 등 설계 시 원가 절감 요인을 두루 고려해 관련 연구를 진행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죠.”
회로 하나 설계할 때도 분신 만들 듯, 혼을 담아서!
▲일에 빠져 사느라 ‘늦깎이 결혼’한 임정돈 마스터의 보물 1호는 올해 네 살이 된 딸이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올해는 딸아이와 좀 더 많이 시간을 보낼 생각”이라고 다짐했다
‘성능은 최고로, 에너지와 비용은 최저로’. 사실 이는 비단 반도체 메모리뿐 아니라 세상 거의 모든 상품에 해당하는 목표다. 하지만 임정돈 마스터처럼 현장에서 기술 개발 업무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 그렇게 뚜렷한 경영 철학을 지니기란 결코 간단찮다. 설사 그런 신조를 품고 있다 해도 제조업 중에서도 신제품 교체 주기가 빠른 편인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며 이를 지켜내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뿐 아니라 대부분의 엔지니어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착수할 때마다 ‘이건 무조건 성공시킨다’는 각오로 머리 싸매고 밤 새워가며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에게 ‘실패한 프로젝트’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프로젝트별 성공률 차이를 따질 순 있겠죠. 특히 동종 업계 경쟁사와 비교했을 때 성과 부문에서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 경험으로 볼 때 그런 차이를 만드는 건 ‘열정의 정도’입니다.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저와 함께 일하는 동료와 선후배는 회로 하나를 설계할 때도 자신의 혼(魂)을 불어넣어, 또 하나의 분신(分身)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사명감을 갖고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붓습니다. 그러면 성공은 자연스레 따라오죠. 동고동락하며 팀워크도 좋아지고요.”
▲임정돈 마스터는 수시로 팀원들과 소통하려 애쓴다. 인터뷰 현장에서 만난 한 팀원은 그를 향해 “소프트 카리스마형 리더”라고 귀띔했다
사실 팀워크는 임정돈 마스터가 업무 도중 가장 신경 쓰는 부분 중 하나다. “평소 후배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성을 살피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즐거운 업무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크고 작은 이벤트를 준비하는 등 팀 내 분위기를 밝게 유지하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죠.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제일 중요한 건 팀원 본인이 일 자체를 재밌어해야 하는 거더라고요.”
고심 끝에 임 마스터가 택한 방식은 말하자면 ‘관심법’이었다. “일단 팀원 개개인이 뭘 잘하는지, 어느 분야에 관심과 소질이 있는지, 업무 역량은 어느 정도인지 등을 면밀히 파악했습니다. 그런 다음, 팀원의 능력보다 약간 높은 업무 과제를 부여해 그가 해당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본인의 역량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믿고 맡겼는데 기대했던 성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물론 있죠. 그럴 땐 덮어놓고 지적하고 나무라기보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친구가 자신의 일을 더 잘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고 살폈어요.”
▲촬영 당시 사무실에 있던 팀원들과 “파이팅!”을 외치며 포즈를 취한 임정돈 마스터. 실제 팀원은 이보다 훨씬 더 많다
반도체 설계와 같은 최첨단 기술 개발, 그 선봉에 서서 ‘고독한 1등’의 길을 걷고 있는 임정돈 마스터가 꼽는 성공의 비결은 뭘까? 그가 내놓은 대답은 의외로(?) 싱거웠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가장 중요한 건 ‘실력’이에요. 본인의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수준의 실력을 갖추려면 매사 끊임없이 탐구하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관련, 그는 지난해 신입사원 공개 채용 당시 면접관으로 참여했던 경험담을 들려줬다. “다들 이른바 ‘스펙’이 대단하더군요. 영어 시험 성적에, 각종 자격증에, 쟁쟁한 인턴 경력에, 해외 연수 경험까지…. 하지만 그 친구들과 함께 일하게 될 제 입장에선 솔직히 그런 프로필보다 ‘전공지식 역량’이 훨씬 더 와 닿았습니다. 실제로 면접 당일 그와 관련된 질문을 꽤 던졌는데 의외로 대답이 서툰 경우가 많았습니다. 만약 삼성전자에 ‘엔지니어’ 자격으로 입사하고자 하는 젊은이라면 ‘전공 공부에 좀 더 주력하라’는 얘길 들려주고 싶어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끊임없이 연구하는 사람”
▲자신을 “천생 기술자”라고 지칭하는 임정돈 마스터는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끊임없이 발전하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임정돈 마스터는 시쳇말로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사람이다. 대학 졸업 후 반도체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국내 주요 기업을 두루 거쳤고 2000년대 초반 벤처 기업 붐이 일 땐 벤처 쪽에도 잠시 몸을 담갔다. 삼성전자에 입사한 건 2004년 9월. 처음부터 낸드 플래시 쪽 연구만 파고든 것도 아니다. 삼성전자 내에서도 불과 사오 년 전까지 D램 설계 업무를 담당했었다. 넓게 겪어 깊이 볼 수 있는, 바로 그 점이 경쟁력인 (본인 말마따나) “천생 기술자”다.
한동안 일과 결혼하다시피 했던 그는 남편도, 아빠도 한참 늦게 됐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요즘도 매일 일에 쫓기는 신세여서 올해 목표 중 하나가 “늦둥이 딸과 좀 친해지는 것”이다. 딸 얘길 꺼내며 소년처럼 활짝 웃는 그의 표정에 문득 미국 출신의 전설적 카레이싱 선수 마리오 안드레티(Mario Andretti, 76)가 겹쳐졌다. 유고슬라비아 난민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스포츠 스타로 거듭난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목표는 열망이 있어야 생긴다. 하지만 그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게 해주는 건 끊임없이 탐구하고 노력하는 자세다.”
인터뷰 말미, 임정돈 마스터는 향후 목표에 관한 질문을 받곤 곰곰이 생각하더니 “스스로 호기심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연구하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바둑계의 거물이신 조훈현 9단께서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끊임없이 연구하는 사람이라고요. 어디선가 그 얘길 듣고 진심으로 공감했습니다. 사회 생활을 시작하고 보니 학교 다닐 땐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을 유지하다가도 막상 취직한 후부턴 주어진 일 이상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 꽤 많더군요. 반면, 무슨 일을 맡기건 최선을 다해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하루 하루 지날수록 조금씩 벌어져 나중엔 돌이킬 수 없는 정도가 되죠.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정신이 번쩍 듭니다.” 그는 “늘 부족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함께 연구∙토론할 수 있는 동료가 있고 즐거운 맘으로 일터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가족이 있는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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