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어쩌면 창의성의 진짜 보고(寶庫)
여기저기서 “창의성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부모치고 ‘우리 아이 창의력 키우기’ 같은 문구에 한 번쯤 혹해보지 않은 적 없을 터. 하지만 구체적 방법론에 이르면 다들 고개를 갸웃거린다. ‘대체 무슨 수로 창의성을 계발할 수 있단 거지?’
“인공지능 세상, 암기는 시대착오적 학습법”이라고?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냄’. 기억(記憶)의 사전적 정의다. 그런데 만약 이 기억이 창의성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다면 어떨까?
뇌(腦)과학에서 기억은 ‘인지 능력의 본질적 구성 성분’으로 정의된다. 실제로 기억은 인간의 지각과 행동에 지속적으로 반영된다. 생각은 이렇게 기억된 것들이 반딧불이처럼 반짝이는 현상이다. 사람들의 일상은 대개 습관적·반복적 행동과 생활 용어로 구성된다. 매일 특별한 운동 능력을 발휘하거나 학술 용어로 소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어려운 추상 명사나 자연과학 서적에나 등장할 법한 개념어를 몰라도 생활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는 건 그 때문이다.
반면, 인간이 자연 현상을 기록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선 필연적으로 수학적(혹은 물리학적) 언어가 쓰인다. 또한 과학적 사고를 전개하려면 과학 용어의 개념을 이해,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혹자는 “요즘 같은 인공지능 시대에 수학 공식을 암기하고 역사적 사건의 발생 연대를 기억하는 학습은 시대에 뒤떨어진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억이 없으면 인간은 그저 동물적 상태에 머물 뿐이다. 당연히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도 없다. ‘새롭다’는 개념 자체가 이전 방식과의 비교를 전제로 하는 만큼 이전 방식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뭔가를 새롭다고 규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알파고가 인간과의 바둑 대국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바탕에도 가공할 기억 능력이 있었다.
기억의 본질적 기능은 ‘뭔가를 잊지 않아 일관된 행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생존에 필요한 사물이나 사건을 유념했다가 비슷한 상황에 닥쳤을 때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돕는단 얘기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인간의 기억은 인지적 측면에서 세 가지 핵심 기능을 갖는다. 오늘 칼럼의 주제도 바로 이것이다.
“내 마음 나도 몰라”, 뇌 입장선 지극히 당연한 결과
첫째, 기억은 정신 작용을 지속하게 해준다. 기억의 지속성은 예외적 정신 능력이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뇌는 매 순간 변화하는 환경에서 입력되는 감각을 그때그때 처리해야 생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생각이 극히 짧게 지속되는 건 그 때문이다. 실제로 생각은 점멸하는 자극에 따라 벼룩처럼 튀어 다닌다. 그러고 보면 유행가 가사 “내 마음 나도 몰라”는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끊임없이 바뀌는 자극을 처리해야 하는 뇌 입장에선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입력되는 감각이 지속적으로 달라지는 자연에서 동물은 감각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감각 종속적 존재가 되기 쉽다. 당연히 기억을 매개로 한 반응은 미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동물, 혹은 (기억이 아직 축적되지 않은) 어린아이의 행동은 감각자극에서 곧장 나온다.
일반적으로 운동엔 두 단계가 있다. ‘계획’이 하나, ‘실행’이 다른 하나다. 즉각적 행동은 별다른 계획 없이 반사적으로 표출된다. 하지만 사춘기를 지나고 학습된 기억이 점차 쌓이며 인간은 무작정 행동하기보다 ‘기억이 반영된’ 행동을 더 많이 한다. 어른이 돼 전두엽이 발달하면 즉각적 반응에서 지연된 반응으로 운동 출력을 점차 지연시킬 수 있다.
목표 지향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은 실시간으로 입력되는 감각 정보를 자신의 기억과 비교, 판단한 후 그 결과를 살펴 목적에 적합한 운동을 선택한다. 단발성 동작이 연결돼 일련의 행동으로 나타나려면 목표 지향적 기억 정보가 지속적으로 반영돼야 한다. 그래서 기억은 정신 작용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사 공부를 예로 들어보자. 고조선·부여·고구려·마한·진한·변한·마립간·진흥왕·왕건·무신정권·이성계·세종대왕·이순신·영조·정조…. 이런 고유명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한국사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요컨대 기억은 정신 작용의 재료가 아니라 역사·수학·문학·예술 등 모든 분야를 관통하며 계산하고 추론하는 정신 작용 그 자체다.
스마트폰 문자 메시지 주고받기, 생각 분산의 주범
매 순간 작동하는 작업 기억은 인간의 현재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빈약한 기억은 빈약한 사고를 만든다. 문명화 이전의 원시 부족인은 오로지 자신이 경험한 사건만 얘기했다. 경험을 일반화한 추상명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각의 사건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순 있었지만 하나의 사건을 다른 유사 사건과 연결 지어 공통점을 범주화하진 못했다.
고유명사와 추상명사는 사물을 지시하고 사물의 본질을 포착, 오랫동안 유지하게 해준다. 오래 기억되며 범주화된 표상은 인간 뇌 정보 처리 과정을 사물과 사건에 지속적으로 집중, 면밀하게 분석할 수 있는 일명 ‘시간적 지속 과정’을 생성한다. 근육 운동과 뇌 신경세포의 작용이 기억의 흔적을 만들어 시냅스 연결이 강화되면 그 연결망은 ‘정보 고속도로’가 돼 강하고 신속한 정신작용을 가능케 한다.
특정 기억이 다른 기억과 연결되려면 일정 시간이 소요된다. 다른 기억과 만나기 전 원래 생각이 바뀌면 다른 기억과 만날 확률은 그만큼 낮아진다. 사물과 사건의 의미를 명확히 판단하려면 비교와 예측, 추론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기억들과의 연결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과정엔 불가피하게 시간이 들며, 그동안 뇌는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해 다른 감각 작용을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요소가 바로 기억이다.
기독교의 주기도문이나 불교의 염불은 반복적 단어 암송을 통해 행위자의 사고를 철저히 하나의 대상에 머물게 하려는 행위다. 생물학 중 생화학 과정을 공부할 때에도 아미노산·ATP·핵산·세포공생·호흡작용·광합성 같은 핵심 개념어를 지속적으로 떠올려야 해당 개념이 느낌으로 의식 깊숙이 자리 잡을 수 있다.
기억은 생각을 한 방향으로 머물게 하는 동시에 다른 생각과 연결 지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만들어낸다. 기억을 유지하는 능력이 약한 사람은 생각이 자주 분산되고 머릿속도 혼란해진다. 스마트폰으로 끊임없이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행동은 사실상 잡담에 가깝다. 자연히 이런 행위가 반복되면 생각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생각의 일관성은 기억을 (집요하게!) 유지하는 시간에 비례한다. 다시 말해 기억은 인간의 사고를 지속시켜줘 사고의 일관성을 만든다. 생각의 일관성은 행동의 일관성으로 이어졌고, 이는 인간 문화 출현의 밑바탕이 됐다. 동물의 행동은 감각에서, 인간의 행동은 기억에서 각각 나온다. 알파고는 대규모로 축적된 기억을 연결, 인간 바둑의 최고 고수를 이겼다. 특정 분야에 한해서이긴 하지만 기계의 기억이 인간의 기억을 이긴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인간은 점점 기억과 멀어지고 있다. 지극히 순간적 행동인 ‘스마트폰 문자 메시지 보내기’가 급증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기억은 시간 차원에서 작동, 미래를 예측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따라서 기억과 거리가 먼 인간은 감각에 종속되는 ‘반사적 인간’일 수밖에 없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 기억∙감정 간 관계 함축
둘째, 기억은 감정과 정서를 동반한다. 이 같은 기능은 ‘지식을 떠올리고 활용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기억의 가치다. 가을·바람·바다·구름·꽃·별…. 이런 단어는 사용자가 누군지에 따라 나름의 고유한 정서가 묻어있다. 하지만 고유명사는 다르다. 어감이 생소해 정서적 관련성을 부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유명사는 처음부터 뇌리에 각인되지 않고 반복적으로 발음해야 비로소 기억된다.
기억은 감정을 일으켜 인간을 행동하게 만든다. 바꿔 말하면 기억이 없는데 웃거나 슬퍼할 순 없다. 특정 분야의 관심과 애정은 전적으로 그 분야의 기억 양(量)에 비례한다. 암석학이나 생화학, 양자역학 같은 단어를 접하고도 아무런 느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건 분명 그 분야에 대한 기억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뇌과학적 측면에서 봐도 기억과 감정은 분리된 실체가 아니며, 일명 ‘파페즈 회로(Papez circuit)[1]’라고 불리는 뇌 신경 회로로 연결돼 있다. 파페즈 회로는 다음과 같은 경로로 구성된다.
해마체(hippocampal formation)→ 뇌궁(fornix)→ 유두체(mammillary bodies)→ 유두시상로(mammillothalamic tract)→ 시상전핵(anterior thalamic nucleus)→ 대상회(cingular gyrus)→ 내후각피질(entorhinal cortex)→ 해마체
신경 자극은 감정·중독 관련 뇌 영역인 편도체와 중격(中隔) 영역에서 기억을 형성하는 파페즈 회로로 입력된다. 불의에 대한 분노, 어려운 시절을 견뎌내는 의지는 모두 강한 정서적 기억에서 비롯된다. 감정적 느낌이 풍부한 사건과 지식이 기억에 오래 남는 건 편도체가 정서적 자극에 반응, 사건 기억을 형성하는 해마로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 교감신경계의 신경 전달 물질)을 분비하기 때문이다.
노르에피네프린은 기억의 공고화 과정을 촉진한다. 꿈에선 노르에피네프린의 분비가 중단돼 기억이 굳어지지(鞏固) 않는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지난밤 꿈 내용이 잘 떠오르지 않는 이유다. 학습 성과는 ‘알고 싶어하는’ 욕구에 비례한다. 경험과 학습을 통해 기억된 내용이 빈약하면 학습 의욕도 기대할 수 없다. 요컨대 기억과 감정은 상호 연관된 뇌 작용이다. 따라서 공부를 잘하려면 배운 내용을 최대한 많이 기억해야 한다. 기억하는 생각을 반복하다 보면 느낌이 생긴다. 결국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기억의 정서적 속성을 단적으로 드러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관점이 필요해? 시선의 방향·높이부터 바꿔봐!
셋째, 기억은 창의성을 발현시키는 핵심 동력이다. 새로운 분야를 학습하거나 중요한 내용을 암기하려는 노력은 종종 평가절하된다. 심지어 혹자는 암기를 창의성의 반대 개념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양질의 기억이 축적되지 않으면 창의성 역시 제대로 발휘되기 어렵다. 창의성이란 ‘새롭고 가치 있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따라서 사물과 사건을 새로운 관점에서 관찰하는 훈련이 전제돼야 한다.
사물을 관찰할 땐 시선의 방향과 높이, 대상과의 거리 등이 주요 변수로 작용한다. 새로운 시선이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주는 셈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사물이든 사건이든 ‘늘 봐왔던 방향으로’ 바라본다. 세상이 좀처럼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시선의 방향을 이전까지와 달리하기 힘든 건 대상과의 일정 거리를 확보하는 일이 쉽지 않은 데 그 원인이 있다.
관찰자와 관찰 대상 간 거리가 제대로 상정되지 않으면 관찰 대상은 관찰자의 일부가 돼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반대로 익숙했던 대상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면 그제야 비로소 새로운 시선이 열린다. 관찰 대상과 접촉하지 않은 채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 해당 대상의 다양한 측면을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시선의 방향이 자유로워지려면 관찰 대상과의 객관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이미 알고 있거나 보고 싶은 측면이 아닌, 그 대상의 다른 측면이 노출된다.
인간은 본래 ‘접촉 지향적 문화’ 성향이 강하다. 접촉 지향은 농경 사회의 대표적 속성이다. 관찰 대상과의 거리 확보가 여의치 않은 접촉 지향 성향은 논리적·객관적 공간을 없애는 한편, 그 자리에 감정적 반응을 자리 잡게 한다. 이런 상황에선 감정적 반응이 판단의 근거로 기능할 수밖에 없다.
시선의 방향이 새로운 세상을 열고 시선의 높이가 가치를 결정한다. 하늘을 올려다 보면 별과 태양이 눈에 들어오지만 사람 키 높이로 시선을 고정하면 사람들만 보일 뿐이다. 인간이 인간에 익숙해지고, 인간에 매몰되는 것이다. 미지의 자연이 사라진 시야를 채우는 건 뻔한 일상 생활 공간이다.
거친 바다를 개척하고자 하는 시선이 대탐험 시대를 열었다. 크고 작은 지리상의 발견과 과학 발전을 가능케 했다. 시선의 방향과 높이를 새롭게 하려면 관찰 대상과의 일정 거리 확보가 필수다. 하지만 접촉 지향 문화는 대상과의 거리를 소멸시켜 객관적 논리의 공간을 사라지게 만든다.
대리석을 건축에 즐겨 썼던 서양인은 기하학적 도형의 객관적 관계에 익숙하다. 서양에서 과학이 태동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창의성은 객관적 사실의 기억을 바탕으로 발생하는 두뇌 작용이다. 객관적 세계에선 사물에 대한 지식의 경계가 분명하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게 과학의 출발이다.
창의성의 본질은 ‘기존 기억의 새롭고도 독특한 조합’
미지(未知)의 세계는 쉬이 접근하기 어렵다. 그래서 가설이 생겨났으며, 그걸 증명하는 과정이 바로 실험이다. 과학은 가설과 실험의 세계이며, 그 바탕엔 무지(無知)에 대한 자각이 존재한다. 창의성은 기존 기억을 새로우면서도 독특하게 조합하는 과정의 결과다. 어렵거나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각자 기억의 새로운 조합을 바탕으로 가설을 세운 후 실험을 통해 그걸 증명해낸다. 그리고 이 모두의 출발점은 기억이다. 기억을 ‘창의성의 바탕’으로 정의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 있다.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1] 미국 신경생리학자 제임스 파페즈(James Papez, 1883~1958)가 발견한 뇌 신경 회로. 파페즈는 이 회로를 설명하며 “감정은 대뇌변연계(감정이나 기억과 관련된 뇌 부위)의 각 구조 간 상호작용에 의해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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