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마음도 가상현실로 치료하는 시대 온다
위 보고서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이하 ‘VR’)과 의료 서비스가 융합된 일명 ‘VR 융합 의료 서비스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지금도 일부 재활 훈련에 VR 기술이 시도되고 있긴 하다. 뇌졸중 등으로 몸 한쪽이 마비된 환자 중 비교적 증상이 가벼운 이는 좀 불편하더라도 마비된 팔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사용을 꺼린다. 잘 움직이는 팔만 반복적으로 쓰다 보니 재활 가능성이 있는 다른 쪽 팔의 회복은 더뎌진다. 심한 경우, 성한 팔에도 무리가 가 2차 질병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만약 외롭고 지루한 재활 훈련 과정에 VR, 가령 팔딱거리는 물고기를 잡는다거나 하는 과정이 접목된다면 얼마나 신날까?
치매·중독·우울증 등 적용 질환 확산 추세
VR 기술은 한동안 재활 치료나 고소공포증 환자 대상 인지 치료,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치료 등 한정된 용도로 쓰여왔다. 하지만 이후 수년간의 연구와 시행착오를 거쳐 △치매 △각종 중독 △대인공포 △불안장애 △우울증 진단 △스트레스 관리 등 현대인의 정신건강 치료 분야에 도입, 다양하게 활용 중이다. 하지만 글로벌 의료 시장에서 VR 기술 도입은 여전히 ‘태동기’에 불과한 만큼 시장 선점이 중요하다.
내가 운영 중인 회사도 수년간의 국가 연구·개발 과제를 수행하며 축적한 데이터와 노하우를 바탕으로 국내 유수 의료진과 함께 기획한 제품을 작년 말부터 출시해오고 있다. 돌이켜보면 정신건강 분야로 진출한 VR 기업이 명심해야 할 한 가지 교훈은 ‘기술에 집착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심리 치료에서 최신 기술보다 중요한 건 상대, 즉 사람의 마음을 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사랑한다는데 왜 안 어색하지?
호아킨 피닉스의 열연과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 연기가 돋보였던 스파이크 존스 감독의 2013년작 영화 ‘그녀(Her)’. 아내와 별거 중인 편지 대필 작가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는 타인의 마음을 전하는 게 직업이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외롭고 공허하다. 어느 날 그는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인공지능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분)를 만난다.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만다로 인해 조금씩 행복을 되찾으며 테오도르는 점점 사만다를 사랑하게 된다.
사만다를 향한 테오도르의 메시지엔 그의 진심이 담겼다. 둘의 대화는 사만다에 탑재된 딥러닝 기술 덕에 사만다를 더욱 진화시킨다. 결국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데이트 시도에 나선다. 스마트폰을 자신의 셔츠 주머니에 넣은 채 말이다. 이 장면에서 스마트폰 카메라는 밖을 향한다. 테오도르가 카메라와 마이크를 통해 사만다에게 세상을 보고 듣게 해주는 장면에서 둘의 감정은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관객은 그 어떤 거부감(어색함)도 없이 테오도르의 감정에 동화된다.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인간’이란 설정, 그리고 미래 인공지능의 탁월한 학습 능력에 감탄한 평론가와 관객은 이 영화를 자연스레 ‘로맨스 영화’로 받아들였다(물론 곳곳에 등장하는 미래 디지털 기술 때문에 종종 공상과학 영화로 분류되기도 한다). 혹자는 이 작품을 ‘내 인생 최고 영화’ 목록에 올린다. 탄탄한 스토리(2014년 아카데미∙골든글로브 각본상 수상)와 빼어난 연출, 주연 배우들의 연기력 등이 어우러진 덕이겠지만 1등 공신은 뭐니 뭐니 해도 영화 기저에 흐르는 사랑의 감정이다.
그런데 테오르드는 왜 사만다가 진짜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래 시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가상현실, 현대인의 고독도 좀 어루만져줘!
미국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 1909~2002)이 1950년 출간한 책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산업사회 속 현대인은 자기 주위를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들의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다. 즉 겉으로 드러난 사교성과 다른 내면적 고립감과 충돌로 번민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고독하다.”
리스먼에 따르면 산업화 과정에서 탈(脫)전통화∙계층화∙개인화 현상이 심화돼 현대 사회는 결국 ‘타인지향형’으로 변모한다. 타인지향형 사회에서 사람들은 무리에서 탈락하지 않으려 주위를 살피고 그에 순응하려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내부에서 행복을 찾는 덴 실패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고독해진다. 그가 말한 “군중 속의 고독”은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쯤 되면 고독은 현대(문명)인의 숙명 같은 것 아닐까?
김춘수 시 ‘꽃’의 표현을 빌리면 사만다를 만나기 전까지 테오도르의 삶은 한낱 외로운 몸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만다와 공감하며 비로소 살맛 나는 인생, 즉 꽃으로 되살아났다. 테오도르는 감히 외칠 것이다. “내 고독을 받아주고 어루만져주는 존재라면 따뜻한 체온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비록 이진법으로 이뤄진 디지털이라도 무슨 상관이랴!” 현대인이 밤낮으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집착하는 이유도 실은 이와 비슷할 터다.
VR을 비롯한 첨단 기술이 심리치료 시장에 속속 적용되고 있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게 있다.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없다면 제아무리 최고∙최신 기술을 활용한 치료법을 시행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단 사실이 그것. 내가 운영하는 회사가 만든 청소년용 가상현실 금연 치료 프로그램엔 금연 지원 캐릭터 ‘용박사님’이 나온다. 그는 등장하자마자 사용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우리 친구들은 무엇을 잘할까요?” 어쩌면 용박사님은 “치료 이전에 ‘나(me)’ 자신을 돌아보는 게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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