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 대(對) 이세돌’ 대국, 그 1년 후
구글의 바둑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t, AI) ‘알파고’와 이세돌 9단 간 ‘세기의 대결’이 있은 지도 벌써 1년이 흘렀다. 이 일을 계기로 ‘AI’라고 하면 으레 조류독감(Avian Influenza)을 떠올렸던 국민들은 인공지능의 위력을 새삼 실감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경제∙사회∙문화∙교육 시스템으론 인공지능 시대를 헤쳐 나가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4차 산업혁명’이란 표현이 국내에서 유독 크게 유행하고 있다.
바둑은 인공지능을 연구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플랫폼이다. 게임의 목표와 규칙을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으면서도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무차별 탐색 기법(Brute Force Tree Search)으론 풀 수 없기 때문에 알고리즘을 연구할 여지도 충분하다. 무엇보다 개발 단계에서 발전해가는 인공지능의 성능을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고(오늘 버전과 어제 버전 사이에 바둑을 100판 두게 해 오늘 버전이 몇 판이나 이기는지 보면 된다), 인공지능이 간혹 오류를 일으켜도 큰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인공지능이 ‘떡수’를 연발해 바둑 한 판 지더라도 그게 대수이겠는가?) 적은 비용으로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다. 알파고가 인간 최고 고수를 넘어섰지만 여전히 ‘신의 경지’와는 두 점 정도의 격차가 있어 후속 연구의 여지도 충분하다.
지난달 21일부터 사흘간 일본 오사카 관서기원 총본부에서 열린 ‘월드바둑챔피언십(World Go Championship)’ 당시 일본 바둑 인공지능 ‘딥젠고(DeepZenGo)’는 한∙중∙일 최정상급 기사들을 상대로 1승 2패의 성적을 거뒀다. ‘젠(Zen)’은 두 명의 개발자가 10여 년 전부터 개발해왔고 알파고 등장 전까지 세계 최고 기력을 자랑했다. 지난해 3월 컴퓨터 바둑대회인 제9회 일본 도쿄 전기통신대학(University of Electro-Communications, UEC)컵에서 우승한 데 이어 이벤트로 벌어진 프로 기사와의 3점 접바둑에서도 승리했다.
이 자체로도 상당한 성과였지만 당시 전 세계 바둑계는 알파고가 인간 최고 고수를 호선(互先, 동등한 조건에서 두는 바둑)에 꺾는 광경을 충격적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젠의 두 개발자도 알파고의 성취에 자극 받아 게임 소프트웨어 기업 드왕고(Dwango)를 찾아갔다. 드왕고가 자금을 대고 도쿄대학교 딥러닝 연구팀이 개발에 합류하면서 ‘딥젠고 프로젝트’는 가동되기 시작했다. 이후 3개월 만인 작년 7월 딥젠고는 두 점 접바둑에서 ‘여류 최강자’ 조혜연 9단에게 승리했다. 작년 11월엔 여전히 일본 랭킹 상위권에 건재하고 있는 조치훈 9단을 상대로 호선에 세 판 중 한 판을 이겼다. 그리고 불과 4개월여 후 세계 최정상급 기사들과 대등한 승부를 벌인 것이다.
딥젠고는 하드웨어 구성 측면에서 알파고와 큰 차이가 있다. 이세돌 9단과의 대결 당시 알파고는 CPU 1920개, GPU 280개를 각각 사용했는데 이는 전 세계 슈퍼 컴퓨터 순위로 치면 500위권에 해당한다. 도입 비용은 대충 추산해도 100억 원 가까이 된다. 그에 반해 딥젠고 서버는 CPU 2개, GPU 4개 등 2500만 원 정도로 구매할 수 있는 수준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간소한 사양의 컴퓨터를 쓰면서도 알파고를 쫓아가는 딥젠고를 보면 일본 과학기술의 저력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올해 월드바둑챔피언십 직전 열린 제10회 UEC컵에선 중국 텐센트의 ‘절예(Fine Art)’가 딥젠고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바둑 종주국인 중국은 인간을 최초로 뛰어넘은 인공지능이 영국(딥마인드)에서 개발되자 이를 (마치 냉전 시대에 우주선 발사 경쟁을 하던 미국과 소련처럼) ‘국가적 자존심이 걸린 문제’로 생각했다.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바둑 인공지능 개발에 필요한 연구비를 기업에 직접 지원해왔다. 우선 세 곳 이상의 회사에 10억 원가량의 시드 연구비를 주면서 경쟁시켰고, 여기서 제일 좋은 성과를 낸 텐센트에 100억 원 이상의 연구비를 제공했다.
인터넷 바둑 사이트에 등장해 절예 못잖은 실력을 선보였던 ‘형천’이나 ‘여룡’도 모두 텐센트 작품이다. 실제로 텐센트는 각기 다른 특징을 갖춘 바둑 인공지능을 동시에 여러 개 개발하고 있을 정도로 이 분야에 전사적 역량을 동원하고 있다. 올해 UEC컵 현장만 해도 개발자 혼자 참석한 딥젠고 팀과 달리 텐센트는 엔지니어와 마케팅∙홍보 담당자 등 10여 명의 팀을 파견했다. 딥젠고와의 결승전이 한창일 때에도 텐센트 홍보 담당자는 이미 우승 인터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지난해 구글처럼 이번 이벤트를 치밀하게 준비해온 느낌이다.
한편, 한국 바둑 인공지능 연구팀[1]은 알파고 열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국산 바둑 인공지능 ‘돌바람’을 지원하고자 우선 정부를 설득했다. “’중소기업 지원 바우처 사업’으로 2억 원가량의 예산을 지원하겠다”는 답변이 돌아왔지만 그걸론 턱없이 부족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대기업들. 하지만 “바둑 인공지능 연구가 당장 어떤 이익이 있느냐”는 시각은 좀처럼 바꾸기 어려웠다. 그러는 동안 이들의 노력은 ‘한국형 알파고 개발’과 같은 식으로 보도되며 대중에게 부정적 이미지만 남겼다. 뼈저린 시행착오를 거쳐 이제 한국 바둑 인공지능 연구팀은 ‘오픈 바둑 리서치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딥러닝 전공자는 전 세계를 통틀어도 100명 안팎에 불과하다. 그중 한국인은 열 명이 채 안 된다. 설사 이들을 모두 동원할 수 있다 해도 구글과 경쟁해서 이기긴 쉽지 않다. 유일한 방법은 전 세계 연구자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생태계를 갖추는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 바둑은 인공지능 연구에서 굉장히 매력적인 아이템이지만 연구자 개개인이 바둑 인공지능 개발에 뛰어들긴 여간 어렵지 않다. 첫째, 딥러닝 연구에 필수인 대량의 데이터(기보∙棋譜)를 확보하기 어렵다. 둘째, 러닝 환경(온라인 서버에 접속해 대국하는 시스템)을 갖추려면 상당한 노력이 든다.
한국 바둑 인공지능 연구팀의 목표는 이 같은 진입 장벽을 제거하는 데 있다. 한국기원이 ‘골드 스탠다드 데이터세트(gold standard dataset)’로서 모범적 기보를 제공하고 러닝 환경도 판후이(樊麾)와 대결했을 당시의 알파고 수준으로 만들어 오픈소스 형태로 공개하겠단 것이다. 그러면 개인 연구자가 손쉽게 아이디어를 적용해볼 수 있고, 그로 인해 바둑 인공지능 성능이 향상되면 논문을 펴낼 수 있을 테니 인재가 모여들 것이다.
한국 기업은 그동안 일명 ‘패스트 팔로우(fast follow)’ 전략으로 선진 기업을 잘 따라 잡아왔다. 하지만 특정 분야의 생태계를 주도적으로 구성하는 일에선 별 성과를 내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그런 이미지를 확 바꾸려는 게 한국 바둑 인공지능 연구팀의 염원이다.
[1] 국내 인공지능 연구진과 (한국기원을 포함한) 바둑계 종사자를 아우르는 개념. 이 칼럼 필자인 감동근 교수도 함께 활동 중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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