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없는 사회공헌 활동, ‘나눔이 당연한 사회’ 정착 위해 꼭 필요”
숲 전체를 보려면 숲에서 멀리 떨어져야 하듯 한 걸음 뒤에서 볼 때 더 또렷해지는 것들이 있다. 2004년 일명 ‘나눔경영’을 선포한 후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쳐온 삼성전자가 황창순 순천향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교학 부총장)에게 손을 내민 건 그 때문이었다. 이전까지의 시도에서 각도를 틀어 완전히 새로운 시선으로 ‘나눔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싶었던 것.
황창순 교수는 철저히 외부인의 시각에서 삼성전자의 사회공헌 활동사(史)를 분석했다. 과거를 답습하지 않고 색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서였다. 오랜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사회 곳곳에 ‘건강한 파트너’를 양성하자”는 것.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지니고도 이런저런 장벽에 가로막혀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비영리재단이 적지 않단 사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국내 최대 사회복지 공모 사업 ‘나눔과꿈’의 콘셉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지난 14일 삼성전자 뉴스룸이 황창순 교수를 만났다. 글로벌 사회공헌 분야에 조예가 깊은 이해균 강원국제개발협력센터장도 함께였다. 3년 연속 심사위원으로 활동해온 두 사람이 생각하는 나눔과꿈, 과연 어떤 프로젝트일까?
시각장애인용 전자책 제작(아이티로 시각장애인사회적협동조합), 이동형 노인복지관 운영(충남 예산군노인종합복지관)…. 나눔과꿈은 지원 대상도, 사업 범주도 어느 한 가지로 규정되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비영리 조직(사회적기업 포함)에 문이 활짝 열려있다. 대부분의 공모 사업이 지원 대상을 사회복지법인이나 공익법인으로 한정 짓는 것과 확연히 구분된다. 황창순 교수에 따르면 이 같은 운영 방식은 ‘혁신의 싹’을 자라게 하는 데 특히 효과적이다(같은 이유로 그는 제안서를 심사할 때에도 보수적이고 안정된 사업보다 좀 엉뚱해도 기발한 접근 방식을 높이 평가한다).
우수한 성과를 낸 기관에 지급되는 인센티브(incentive) 제도 역시 국내 사회공헌 프로그램 중 나눔과꿈에만 존재한다. 이해균 센터장은 “지급된 인센티브는 ‘자율 운용’이 원칙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 자유롭게, 이를테면 직원들끼리 포상 휴가를 갈 때 써도 되는데 1·2차 연도에서 인센티브를 받은 기관 대부분이 그 돈을 고스란히 사업비로 다시 투자하더라”며 “본인들의 사업 틀을 확고히 다지겠다는 의지가 느껴져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제아무리 완벽한 설계도로 지은 집이라 해도 일정 시간이 흐르면, 혹은 예상치 못한 환경에 노출되면 곳곳에서 탈이 나게 마련이다. 사회공헌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이 같은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나눔과꿈은 심사위원들에게 (집으로 치면) 보수 작업의 일부를 의뢰했다. 중간 평가나 현장 조사 등을 통해 지원 대상 구성원들과의 ‘스킨십’을 이어가도록 한 것. 이해균 센터장은 “형식적으로 잠깐 들여다보는 형태는 아니다”라며 “현장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사업 발전에 도움 될 만한 제언을 늘려가며 기반을 탄탄히 다지는 중”이라고 말했다. “현장을 찾았을 때 수행 기관 분 대다수가 ‘평가 받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막상 겪어보니 컨설팅 받는 느낌이어서 좋다’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저희도 그런 얘길 들으면 힘이 납니다.”
1·2차 연도에 선정된 기관 수는 총 102개. 투입된 예산만 200억 원에 이르렀다. 지금 이 시각에도 이들은 국내외 곳곳을 누비며 사회를 환히 밝히는 등불이 되고 있다. 특히 과감한 아이디어로 도전장을 낸 이들은 사업이 진행되며 성장을 거듭하는 중이다. 취약 지역 거주 청소년의 환경 개선에 나선 ‘공공미술프리즘’ 사업도 그중 하나다.
경기 파주시 법원읍 법원6리 일대. 골목이 좁은데다 빈집도 많아 비행 청소년의 일탈 장소쯤으로 치부돼온 곳이다. 공공미술프리즘은 이런 환경을 개선하고 청소년이 활용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을 마련하며 마을에 활기를 더하고 있다. 황창순 교수는 “(공공미술프리즘을) 지원 기관으로 선정하면서도 아이디어가 워낙 파격적이어서 걱정 반, 기대 반이었는데 다행히 단계를 밟아가며 자체 역량이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다”며 “앞으로도 비영리조직의 인적·물적 운영 능력을 키우는 데 프로젝트의 초점을 맞춰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국내 사업도 마찬가지지만 해외 사업은 더더욱 변수가 많다. 지역별 문화적 특성을 감안한 진행은 기본. 여기에 크고 작은 법적 문제까지 완벽히 통제해야 한다. 나눔과꿈 운영진이 해외 사업 신청 요건에 ‘해당 국가 활동 경력 1년 이상’ ‘현지 사무소 보유 여부’ 등 추가 항목을 넣고 깐깐하게 들여다보는 건 그 때문이다. 특히 활동 지역이 개발도상국인 경우, 수혜자인 현지인이 사업 진행 필요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무시로 벌어진다. 본격적 사업 진행에 앞서 그들의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
‘서(西)케냐의 경제 중심지’로 불리는 우아신기슈(Uasin Gishu) 카운티. 인구 100만 명 이상의 꽤 큰 도시지만 이곳에 거주하는 사회복지사는 여덟 명이 전부다. ‘지구촌나눔운동’은 단순 예산 지원과 재능 기부를 넘어 이 지역에 깊이 뿌리 박힌 ‘대(對)장애인 인식 개선’을 활동 목표로 정했다. 자체 조사를 거쳐 장애인 자녀를 둔 현지 가정 대다수가 아이들을 좀처럼 집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단 사실에 착안,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초점을 맞춘 활동을 구현해가고 있다. 이해균 센터장은 “장애인이 집 밖으로 나올 용기를 얻으려면 가정 내 호응이 필수”라며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한 후 그에 따른 인프라 지원 활동을 펼쳐 소정의 성과를 거뒀단 점에서 지구촌나눔운동 사례는 뜻깊다”고 설명했다.
나눔과꿈이 지원하는 기관 대부분은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깊다. 지원 기간이 유한한 공모 사업의 특성상 ‘지원이 끊긴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 황창순 교수가 심사 단계에서 ‘홀로 서기 가능성’을 타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회성으로 소비되는 사업이나 출구 전략이 잘 보이지 않는 사례는 과감히 제외시켰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건 물론 지원 기간이 끝난 후에도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거죠. 하지만 사업의 영향력이 크고 사안이 중대하다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는 공공 예산 사업으로 발전시키는 방안도 시도해봄 직합니다.”
바로 오늘(28일), 나눔과꿈 사업의 세 번째 ‘파트너’ 명단이 공개됐다. 1106개 후보가 6개월여간 경합을 벌인 끝에 국경없는교육가회·의정부시일시청소년쉼터<아래 박스 참조> 등 65개 팀이 ‘나눔’ 호 탑승 기회를 얻었다. 이들은 내년 1월부터 본격적 사업에 착수할 예정이다.
두 심사위원은 “기관별 제안서의 완성도가 예년에 비해 상당히 업그레이드됐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해외 사업 분야에선 일명 ‘겉핥기’ 식(式) 제안서가 자취를 감췄다. 기획 단계부터 현지 사회의 사정을 고려하는가 하면, 주민들을 그저 수혜 대상으로 보지 않고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등 각고의 노력이 돋보였다. 이해균 센터장은 “단순한 나눔에서 탈피, 지역 공동체의 자활을 도우려는 고민이 엿보이니 사업에 대한 기대치도 덩달아 높아지더라”고 귀띔했다.
1000건이 넘는 제안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하다 보면 오늘날 한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도 자연스레 드러난다. 올해 유독 눈에 띄는 키워드는 양극화, 그리고 일자리 창출이었다. 황 교수는 “(두 이슈 모두) 워낙 거대한 문제여서 단번에 해결책을 찾긴 쉽지 않지만 올해 접수된 제안서 중 상당수에서 극복 의지가 엿보였다”며 “구인·구직이 보다 쉬워지고 구직자에게 실질적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사업이 탄생할 수도 있으니 기대해달라”고 당부했다.
“세상이 단번에 바뀌진 않는다. 하지만 작은 노력이 모이고 모이면 언젠간 커다란 물결을 만들 수 있다.” 두 심사위원이 3년을 한결같이 나눔과꿈 프로젝트를 함께해온 건 이 같은 신념이 굳건했기 때문이다. 인터뷰 말미, 두 사람에게 나눔과꿈 프로젝트에 거는 기대와 당부 한마디를 부탁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어린이합창단을 운영하며 만난 한 여자아이가 기억에 남아요. 매주 토요일이 연습 날이었는데, 집에서 꼬박 두세 시간을 걸어 와야 하는 거리인데도 결석 한 번 않더군요. ‘(연습 끝나고 나눠주는) 간식 때문인가?’ 막연히 생각했는데 그 아이가 그러더라고요. 1주일 중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게 연습 시간이라고, 덕분에 더 열심히 살고 싶어졌다고. 베푸는 쪽에선 작은 나눔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어떤 이에겐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할 정도의 위력을 지닙니다. 그게 나눔과꿈 같은 프로그램의 가치 아닐까요?” (이해균)
“봉사에 대한 인식이 과거에 비해 많이 발전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고 하긴 어렵죠. 더 많은 이가 봉사를 지속적으로 학습하며 끊임없이 경험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나눔과꿈처럼 조건 없는 사회공헌 활동이 그 명맥을 계속 유지해간다면 한국에도 머지않아 ‘나눔이 당연시되는’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황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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