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가뭄에 단비’ 기술, 정보 소외계층 껴안다
매년 4월이면 왁자하던 대학 캠퍼스가 아연 고요해진다. 중간고사 기간이라 대부분의 학생이 도서관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는 새로운 고민에 빠진다. 이들의 문제는 공부할 ‘재료’가 마땅치 않단 것. 일반 교재는 읽을 수 없는 시각장애인 대학생이 그 주인공이다.
국내에만 1500여 명 있는 걸로 추산되는 시각장애인 대학생이 시험 공부를 하기 위해 필요한 건 점자∙음성 파일로 구성된 대체 교재다. 이들이 대체 교재 제작을 의뢰하는 건 보통 개강 직후. 하지만 실제 교재를 받기까진 최소 한 달이 소요된다. 그때면 이미 중간고사는 목전에 와있다. 교재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대체 교재 수령 일정은 더 늦어진다. 한쪽에선 읽을 책이 넘쳐나는데 시각장애인 대학생에게 ‘필요한 책 제때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남보다 두세 배는 열심히 뛰어야 하지만 출발부터 뒤처질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책이라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환경’ 선사하기, 불가능한 걸까?
지난달 24일 서울 서초구 방배로에 위치한 아이티로 시각장애인사회적협동조합(이하 ‘아이티로’) 사무실에서 마주한 김정호<위 사진> 아이티로 대표는 “전국 25만 시각장애인은 단 한 번도 ‘책 가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 그 자신도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 누구보다 책 공급 불균형 문제를 피부로 느껴온 주인공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제가 다니던 학교에 도서관이 생겼어요. 기쁨도 잠시, 시각장애인용 도서 목록은 A4 용지 한 장이 안 되더군요. 하는 수 없이 ‘읽고 싶은’ 책 대신 ‘(도서관에) 있는’ 책을 읽었죠.” 당시 그가 골라 들었던 책은 고교생 권장 도서로 분류되는 ‘데미안’[1]이었다. “내용 이해는 엄두도 못 냈어요. 무작정 읽는 것 말곤 도리가 없었죠. 어른이 되고 보니 문제의 심각성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시각장애가 있는 어린이나 청소년은 크고 작은 사회적 문제를 겪으면서도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기 힘들잖아요. 그런데도 그들에게 제공되는 도서 수는 턱없이 부족해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죠.”
고심 끝에 김 대표가 떠올린 아이디어는 ‘협업’이었다. 집단지성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위키피디아, 군중에 호소해 자금을 조달하는 크라우드펀딩 등에서 영감을 얻어 시각장애인용 도서 제작에 협업 방식을 녹인 것. 절대적으로 부족한 공급량을 따라잡고 원하는 이에게 제때 책을 제공할 수 있으려면 그게 최선이었다. 그 결과가 2016년 7월 아이티로 설립 이후 구축된 ‘이북(e-book) 크라우딩 시스템’<아래 박스 참조>이었다.
시스템은 전에 없이 참신했지만 실상은 녹록지 않았다. 한국시각장애인협회에 요청해 기술 자문을 얻고 개발에 속도를 냈지만 번번이 한계에 부딪쳤다. 비영리재단으로 꾸려가야 하다 보니 고질적 인력난과 자금난도 발목을 잡았다. 그러던 중 김 대표의 눈에 띈 게 삼성전자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함께하는 ‘나눔과꿈’ 사업 공모였다. 도전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최종 경쟁률 22대 1의 높은 벽을 넘고 당당히 선정, 3년간 5억여 원을 지원 받게 된 것.
아이티로가 나눔과꿈 공모를 통해 지원한 ‘시각장애인의 책 가뭄 해결을 위한 이북 크라우드 구축과 운영’ 사업은 나눔과꿈 프로젝트의 방향성과도 부합한다. 유은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배분사업본부 대리는 “해를 거듭할수록 나눔의 경향도 변하는 추세”라며 “한동안 사회 약자와 직접 만나 이뤄지는 활동이 대세였다면 요즘은 IT 기술 등을 활용, 보다 많은 이에게 기여할 수 있는 서비스가 주목 받는다”고 귀띔했다. 유 대리의 말처럼 나눔과꿈 공모를 통한 수혜자 수는 예산 규모가 매년 동일한데도 지난해 2만5454명에서 올해 3만6781명으로 44.5%나 늘었다.
이렇게 선정된 사업들은 체계적 관리 아래 저마다 서비스를 확장해간다. 장애인·아동청소년·환경 등 카테고리별 전문가가 각 기관에 배정돼 실질적 피드백을 제공하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담당자는 사업 현장을 주기적으로 찾는다. 모두 힘을 합쳐 사업 절차를 단계별로 점검하고 프로젝트가 최적의 환경에서 진행될 수 있도록 개선점을 도출하는 구조다.
자체 시스템 개발에 애를 먹었던 아이티로 역시 본격적 지원이 시작된 올 초 이후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문 개발 업체를 선정, 세세한 부분을 하나둘 만지고 자원봉사자 대상 이벤트를 기획하는 등 그간 머릿속으로만 그려온 목표를 착착 실행하고 있다. 김정호 대표는 “나눔과꿈 지원 사업으로 선정된 이후 지금까지 약 6개월간 제작한 시각장애인용 이북이 800권을 넘어섰다”며 “2016년 사업을 시작한 후 지난해까지 만든 책 권수보다 많은 것”이라고 귀띔했다.
‘내 작은 나눔으로 누군가의 꿈이 자랄 수 있다면….’ 봉사에 참여하는 이라면 누구나 품을 법한 바람이다. 대학에서 교양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김진선(52)씨도 마찬가지다. 인터뷰가 있던 날, 타이핑 봉사 활동을 하기 위해 딸 이윤(12)양과 아이티로 사무실을 찾은 그는 “처음엔 그저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해 (봉사를) 시작했지만 요즘은 이 활동을 통해 되레 내가 성장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진선씨는 아이티로가 설립되던 2016년부터 타이핑 봉사를 시작한 ‘3년차 베테랑 봉사자’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도 3년씩 꾸준히 이어가긴 결코 쉽지 않다. 그는 “혼자서 책 한 권을 무조건 완성해야 하는 게 아니어서 자투리 시간을 활용, 부담 없이 봉사에 참여할 수 있는 점이 가장 좋다”며 “자칫 헛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뿌듯함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운영진에 의해 신중하게 선별된 책을 ‘맛보기’로 읽을 수 있는 것도 아이티로 타이핑 봉사의 장점 중 하나다. 타이핑 도중과 제출 직전 등 최소 두 번의 확인 절차를 거치며 양질의 콘텐츠를 자기 것으로 흡수할 수 있기 때문. 실제로 김진선씨는 “타이핑하며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모르게 자기 반성과 치유가 되는 기분”이라며 “인문학적 깊이를 쌓는 기회이기도 해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도 (봉사에 동참하길) 적극 추천한다”고 말했다.
“절 포함해 아이티로와 함께해주시는 분 중 시각장애인이 많습니다. 어쩌면 다른 시각장애인 동료에게 돌아가야 할 것들을 우리가 차지한 덕에 여기까지 온 건지도 모르겠어요. 제 역할은 그 혜택을 시각장애인 사회에 온전히 돌려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부지런히 쫓아가겠습니다.”
김 대표의 포부처럼 아이티로는 차근차근 필요한 단계를 밟아가며 조금씩 단단해지는 중이다. 올겨울엔 앞서 살펴본 시각장애인 대학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플랫폼도 무료로 공개할 예정. “실패해도 괜찮으니 일단 한번 해보라, 는 삼성전자의 믿음에 큰 힘을 얻었다”는 그의 말처럼 당연하게 여겨지던 걸 혁신적으로 바라보고 응원하는 사회 분위기가 널리 확산되길 기대한다.
“국내 최대 사회복지 공모사업 운영, 보람 느낍니다”
실무진이 말하는 ‘나눔과꿈’ 사업 A to Z
Q. 심사 과정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보는 가치는
사업 목적 자체가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효과적 사업 발굴’이기 때문에 혁신성을 가장 많이 본다. 즉 ‘기존에 없던 방법으로 사회에 커다란 파급 효과를 끼칠 사업’이 우선 순위에 오른다. 그 밖에 효과성∙효율성∙실현(지속)가능성 등도 면밀하게 검토한다.
Q. 최장 3년까지 지원하는 사업도 있던데 어떤 절차로 관리하나
매년 11월 그해 사업을 평가하고 다음 해 사업 계획서도 검토한다. 그 과정에서 애초 설정했던 목표에 맞게 사업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추후 발전해갈 ‘포인트’는 뭔지 짚는다. 부족한 부분은 전문가 그룹의 도움을 받아 수정, 보완하고 그 결과는 자문 단계에서 활용한다.
Q. 나눔과꿈이 여느 사회복지 공모 사업과 차별화되는 부분은
장∙단기 구분 없이 프로젝트를 우수하게 마친 팀엔 최대 2000만 원의 인센티브가 지급된다. ‘실행 과정에서 혁신을 이뤄냈고 성과가 창출됐으면 적절한 포상이 따라야 한다’는 취지에서 마련한 제도다. 우수 기관 선정 작업은 각 프로젝트 종료 시점에 사업 성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이뤄진다. 지난해의 경우, 총 36개 단기 프로젝트 수행 기관 중 다섯 곳에 인센티브 혜택이 돌아갔다.
Q. 사업 종료 후 지원이 끊겨 어려움을 겪는 기관과 관련, 대책이 있다면
장·단기 사업 모두 지속가능성을 수시로 점검한다. 그래야 지원 종료 이후에도 자생적으로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심사 단계에서부터 지속가능성을 살필 수 있는 항목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사업 시행 도중엔 전문가 자문을 거쳐 각 항목을 실제로 구현해간다. 다행히 요즘은 나눔과꿈 사업에 선정된 사실이 해당 기관의 ‘업무 수행 역량 인증서’로 통할 만큼 내실을 인정 받았다. 나눔과꿈 사업 선정을 계기로 지방자치단체나 다른 복지사업의 후원을 받는 경우도 많다.
Q. 2019년 지원 대상 선정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데 가장 기대되는 부분은
해가 거듭될수록 다양한 분야의 기관에서 빛나는 아이디어가 도착한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차원에서도 이제껏 접근하지 못했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돼 뜻깊다. 올해 역시 대학 동아리나 소셜벤처, 환경 단체 등 다양한 기관에서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 내년 한 해는 또 어떤 새로운 사회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책을 찾아가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1] Demian.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가 1919년 발표한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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