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공학자가 4D영화를 만났다… 스크린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2018/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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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SUNG Newsroom. 삼성전자 뉴스룸이 직접 제작한 기사와 사진은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3부작 특집 기획] 대한민국 미래기술 프론티어를 만나다 3 최승문 포항공과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 <연재 끝>

스크린 속 하늘을 날던 주인공이 별안간 안개 자욱한 지상으로 추락한다. 그와 동시에 관람석은 앞뒤로 출렁이고 수증기가 눈앞을 가득 메운다. 관람객이 스크린에 완전히 몰입, 주인공의 상황을 실감 나게 체험하는 순간이다.

영화를 즐기는 기준이 새로워지고 있다. ‘언제, 어디서 볼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볼 것인가’까지 고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2D(평면 영상)에서 3D(입체 영상), 다시 4D(감각 체험 영상)으로 넘어오며 대형 스크린 아래 우두커니 앉아있던 관객은 조금씩 ‘스크린 속 장면의 일부’가 되기 시작했다.

▲최승문 교수가 제자들과 함께 연구하는 공간엔 4D영화 전용관에 있는 것과 동일한 무빙 체어(moving chair)가 설치돼있다. 대당 단가가 상당한 고가 장비지만 보다 효율적인 연구를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한 것이다

▲최승문 교수가 제자들과 함께 연구하는 공간엔 4D영화 전용관에 있는 것과 동일한 무빙 체어(moving chair)가 설치돼있다. 대당 단가가 상당한 고가 장비지만 보다 효율적인 연구를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한 것이다

요즘 최승문(47) 포항공과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4D 효과 제작에 들이는 품을 줄일 수 있을까?’에 온통 쏠려있다. 개별 장면을 일일이 분석한 후 4D로 제작했던 게 기존 방식이라면 그가 연구 중인 ‘가상현실을 위한 지각·감성 동작 효과 시스템’은 상황별 4D 효과를 자동으로 생성, 적용하려는 게 목표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두면 자동 생성된 4D 효과를 실시간으로 송출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최 교수는 이 프로젝트의 혁신성과 실험 정신을 인정 받아 2018 하반기 삼성전자 미래기술육성사업(이하 ‘미래기술육성사업’) 지원과제의 주인공이 됐다. 지난달 31일, 흡사 극장 상영관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 대형 스크린에 4D 영상 관람 전용 의자까지 구비된 그의 ‘놀이터 같은’ 연구실을 찾았다.

삼성전자 미래기술육성사업 / 대한민국 기초과학 기술 발전을 목표로 10년간 1조5000억 원을 지원하는 삼성전자의 사회공헌 사업. 2013년 시작돼 올해로 5년째에 접어들었다. 2018년 11월 현재 총 7300명의 연구원이 선정됐으며, 그들이 이끄는 466개 과제에 5942억 원이 투입됐다. 연구진이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실패해도 책임을 묻지 않는 일명 ‘하이 리스크, 하이 임팩트(high risk, high impact)’ 원칙에 근거해 운용된다

“좋은 성과 나오려면 연구자 발목 잡는 ‘중복 과제’ 허들부터 걷어내야”

세상만사엔 다 때가 있는 법. 최승문 교수와 미래기술육성사업 간 만남의 이면에도 완벽한 ‘타이밍’이 존재했다. 사실 이번 연구의 전신은 최 교수가 모 국가 과제에 선정돼 3년간 이어온 기초 연구다. 지원 기간 종료 후에도 후속 연구를 이어갈 방법을 찾던 그의 눈에 우연히 띈 게 다름아닌 미래기술육성사업이었다. “미래기술육성사업은 학계에서도 경쟁률 세고 심사 까다롭기로 유명해요. 다들 삼수(三修)는 기본이라더군요. 연구 책임자로 도전한 첫 시도 만에 지원 과제로 선정됐으니 전 무척 운이 좋은 경우죠.”

연구자료를 넘기는 최승문 교수

이번 기회는 최 교수에게 특히 소중하다. 4D 효과 제작과 관련, 수 년간 연구해온 과제를 ‘끊김 없이’ 심화 단계로 이어갈 수 있게 해줬기 때문이다. 그가 이처럼 연구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데엔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어떤 학자가 A사업의 지원을 받아 과제를 수행했다고 가정해볼까요? 학자 입장에선 지원 기간 종료 여부와 무관하게 해당 과제를 계속 이어 연구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B사업 운영진의 눈에 그런 시도는 십중팔구 ‘중복 과제’로 비치죠. 이런 풍토가 반복되면 아무리 좋은 연구도 기초 단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최승문 교수는 “이번 연구도 처음 2년가량은 관련 분야를 공부하고 다양한 시도를 거듭하는 기간이었던 만큼 가시적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제 좀 깊이 있는 결과물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싶을 때에 (지원 종료로) 연구가 중단되고 ‘중복 과제’의 허들에 걸려 다른 사업에 지원할 수 있는 길도 막힐까 봐 걱정이 컸어요. 다행히 미래기술육성사업 심사 단계에서 ‘심화 연구가 필요한 연구’란 공감대가 형성돼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었죠.” 그는 “여러 학자가 동일한 주제를 다룬다 해서 모두가 같은 길로 가진 않을뿐더러 다양한 갈래의 길을 개척하기 때문에 획기적 해답을 도출할 가능성이 오히려 커진다”며 “연구자를 믿고 좀 더 먼 곳을 내다보는 연구 지원 풍토가 자리 잡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 땀 한 땀 손으로 입히던 4D 효과, 일부를 ‘알고리즘화’ 할 수 있다면?

영화에 4D 효과를 입히는 일은, 아직까진 ‘사람’의 영역이다. 극의 기승전결 구조를 감안, 어느 부분에 어떤 효과를 줄 건지 결정한 후 ‘한 땀 한 땀’ 적절한 효과를 줘야 하기 때문. 보다 정교한 몰입감을 부여하기 위해 같은 장면을 수십 번 돌려보며 작업해야 하는 경우가 태반인 만큼 인력과 시간의 투입량이 어마어마하다.

▲최승문 교수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들이 연구 주제를 궁금해하면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연구실 내 4D 무빙 체어에 앉힌다. 사진은 ‘1인칭 시점의 롤러코스터 4D 효과’ 체험 장면 모습

▲최승문 교수는 손님들이 연구 주제를 궁금해하면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연구실 내 4D 무빙 체어에 앉혀놓고 연구실에서 직접 제작한 콘텐츠를 보여준다. 사진은 ‘1인칭 시점의 롤러코스터 4D 효과’ 체험 콘텐츠가 상영 중인 모습

최승문 교수는 이 수작업 공정의 일부를 알고리즘화(algorism化)했다. 모션 효과를 세세히 분류해 일정한 체계를 구축한 다음, 시스템이 스스로 영화 내 영상과 소리를 분석해 각 체계에 적합한 모션 효과를 만들어내도록 한 것. 그는 “요즘은 스크린 속 인물이 왼쪽으로 움직이면 의자를 반대 방향으로 꺾어 효과를 극대화하는 등 알고리즘을 다듬는 단계”라며 “자동 시스템에 수작업을 적절히 섞어 한층 섬세한 효과를 구현해나가려 한다”고 말했다.

최근엔 ‘관객의 감성을 인지하는 4D 효과’로까지 나아가기 위한 준비도 시작했다. “가끔 일반인을 대상으로 이런저런 테스트를 실시하는데 반응이 다양해요. ‘이 효과는 어지러워요’ ‘이 장면에선 집중이 잘 안 돼요’ ‘실제 화면에 들어가있는 것 같아요’ 같은 반응을 듣다 보면 앞으론 개개인의 감성 영역을 특성화할 필요가 있겠구나, 싶죠. 현재로선 그 분야에 대한 실험이나 연구 결과가 전무한 상태거든요.”

4D 기술을 설명하는 스크린 앞에서 포즈를 취한 최승문 교수

4D영화 기술이 상용화된 건 2009년. 역사로 치면 10년이 다 돼가지만 최 교수에 따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4D 업계가 진정으로 활성화되려면 지금부터라도 두 팔 걷어붙여야 합니다. 기반을 다지고 심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죠.” 그가 이 분야의 ‘오픈소스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같은 분야 연구자끼리 각자 연구한 결과와 데이터 소스를 공유하며 동향을 파악해나가는 과정에서 기술 발전은 자연스레 이뤄질 것”이란 게 그의 설명이다.

“미래기술육성사업, 젊은 과학자들에게 ‘커리어 보증서’로 통하는 날 오길”

미국엔 ‘커리어어워드(CAREER Award)’란 시상 제도가 있다. 미국 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 NSF)이 전도유망한 이공계 신진 교수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미국 내에서 커리어어워드는 ‘테뉴어[1]행 티켓’으로 불릴 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수상 경력이 일종의 ‘보증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모처럼 연구실 식구들과 단풍 가득한 교정에 선 최승문 교수. 그는 늘 제자들에게 “세계적 성과를 내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자신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목표 설정”이라고 조언한다

▲모처럼 연구실 식구들과 단풍 가득한 교정에 선 최승문 교수. 그는 늘 제자들에게 “세계적 성과를 내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자신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목표 설정”이라고 조언한다

최승문 교수는 “미래기술육성사업도 젊은 과학자 사이에서 커리어어워드 같은 위상으로 인식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기만 하면 혁신적 아이디어를 지닌, 유능한 연구진은 자연스레 몰려들 거란 얘기다. 그는 “(미래기술육성사업이) 연구자의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프로그램인 만큼 실제로 과제 지원을 신청하는 청년 과학자의 비중이 높은 걸로 알고 있다”며 “앞으로도 깐깐한 전형과 ‘어벤져스급’ 심사위원단 구성 등 사업 수준을 현행대로 유지해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앞다퉈 도전하는 등용문으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가 삼성전자에 건넨 마지막 당부는 “지금 이 시각에도 어딘가에서 자신의 연구 분야에 몰두해 있을 재야의 고수들에게 관심을 가져 달라”는 것이었다. “세상을 바꿀, 유의미한 결과는 비단 대규모 프로젝트에서만 나오지 않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뭔가를 만들어내는 연구자가 의외로 많아요. 그들을 적극 발굴, 꾸준히 지원하는 풍토가 조성되면 우리나라 과학계도 고루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실패 두려워 않고 도전하는 연구진의 존재 자체가 성과” 뉴스룸이 묻고 실무진이 답했다, ‘미래기술육성사업 A to Z’<작게> Q. 과제 선정 과정에선 어떤 항목을 가장 중점적으로 보나요? “이 과제가 ‘국내 최고’를 넘어 ‘글로벌 최초(혹은 최고)’ 수준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을까?”부터 생각합니다. 실패를 용인한다, 는 원칙에 부합하도록 성공 가능성보다 미래 가치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죠. 내부에선 “(연구) 성공률이 20% 내지 30%만 돼도 훌륭하다”고 말할 정도예요. Q. 사업이 시행된 지 5년이 흘렀습니다. 학계의 반응이 궁금한데요 초기엔 “삼성 내부에서 연구 제안서를 활용하는 것 아니냐”란 헛소문이 돌 정도로 학자들이 사업 참여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전국 대학과 공공연구소를 400회 이상 찾아 다니며 설명회를 열었고 소통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며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했죠. 참고로 말씀 드리면 미래기술육성사업에 제출되는 연구 제안서나 계획서, 성과물 일체는 별도 데이터 서버를 통해 엄격하게 관리됩니다. 삼성전자 관계자라 해도 열람은 절대 불가능해요. 저희의 노력이 통했는지 요즘은 연구 책임자가 오히려 산업계와의 협력을 요청하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그럴 땐 연구 책임자가 희망하는 과제에 한해 자료를 공유하고 협력 방안을 협의하도록 지원합니다. Q. 미래기술육성사업은 다른 유사 사업과 어떤 점에서 가장 크게 차별화되나요? 저희는 연구자가 자신의 성과를 산업계에서 제대로 평가 받을 수 있도록 R&D 교류회 등의 행사를 지원합니다. 보안이 유지되는 자리인 만큼 행사장에선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연구 데이터가 활발히 오가죠. 업계 리더급 인사들과의 심도 있는 토론도 이뤄지고요. Q. 지난 5년간의 성과를 정량적 측면에서 자평하신다면요 항암 치료제, 장애인 보조 로봇 등 공익에 기여하면서 산업에도 적용할 수 있는 과제가 다양하게 수행되고 있습니다. 대부분 미래 산업에 적용 가능한 연구 주제죠. 사업이 완료되는 10년차쯤엔 대략 2000명에서 3000명 사이의 교수와 2만여 명의 석·박사 연구진이 미래기술육성사업과 함께할 전망입니다. 그 분들의 활약을 통해 학계는 물론, 산업계 전반에도 혁신이 도래하길 기대합니다. Q. 수치로 산출되는 건 아니지만 자체적으로 유의미하게 보시는 성과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과제는 정말 성공하기 힘들 것”이란 안팎의 우려를 보란 듯이 극복하고 성과를 내는 연구진이 꽤 많습니다. 열심히 연구했고 실패에 부딪쳤지만 다른 접근법을 찾아 기어이 해답을 찾아내는 연구진도 있고요. 이런 학자들과 함께할 수 있단 것, 그 자체가 저희에겐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성과입니다. Q. 시간적으로나 비용적으로나 투자 규모가 엄청납니다. 삼성전자가 왜 이런 일을 하나요? 매년 노벨상 시상 시즌이면 꼭 등장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을까?" 인류와 산업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연구 성과가 나오려면 과감한 장기 투자가 선결돼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특히 취약한 기초 학문의 수준을 높이고 인재도 육성할 수 있죠. 삼성전자는 미래기술육성사업이 그 마중물 역할을 하길 희망합니다. ※위 내용은 미래기술육성사업 관계자와의 인터뷰를 문답 형태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1]tenure. 대학에서 교수의 평생고용, 즉 종신재직권을 보장해주는 제도. 교수로 임용된 후 일정 기간 동안의 연구 실적과 강의 능력 심사를 통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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