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직원 칼럼] 헤라클레스, 알람브라 궁전, 가우디…스페인이 품은 혼재의 미학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 –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 중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 영화 <블러드 워크> 중
네[1] 도시 이야기: 세비아, 그라나다
“무리요[2] 특집전을 보셨다면 벨라스케스[3]의 <시녀들>도 꼭 한번 보세요” 세비야에서 택시를 운전하는 호세 마뉴엘 씨는 같은 고향 출신 화가들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알람브라 궁전이 있는 그라나다를 거쳐 세비야에 온 것이 어제. 햇볕에 하얗게 표백된 느낌의 도시다. 잎이 지고 뾰족해진 가로수가 겨울 햇살에 빛난다. 거리는 넓고 여유롭다. 트램과 자전거가 함께 달린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한다. 세비야는 ‘시장이 열리는 곳’이란 뜻을 갖고 있다. 이름이 알려주듯 이곳은 500년 전 유럽 최대 도시로 흥했다.
스페인을 품은 이베리아반도는 예부터 지중해 해상 무역의 거점이다. 그리스, 로마, 서고트, 페니키아, 이슬람, 타르테시아, 켈트 등 다양한 민족이 이곳을 거쳐 갔다. 여러 얼굴을 지닌 다양성의 나라다. 이질적인 것들이 만나 조화를 이루고 혼종의 문화를 이뤘다. 그래서일까? 스페인 사람들은 뭐든 섞어 마시기를 좋아한다. 생맥주에 레몬에이드를 넣은 클라라가 있고, 와인에 과일과 과일즙, 탄산음료나 소다수를 섞어 만든 샹그리아도 즐긴다. 우유에 달걀흰자와 설탕, 계피 등을 넣어 마시거나 얼려 먹는 디저트도 있다. 조리 방법 역시 끓이고(동부), 튀기고(남부), 삶고(북부), 굽는(중부) 등 각 지역이 선호하는 방식이 공존한다.
세비야에 오기 전 들렀던 그라나다는 도시 곳곳에 점선을 그어 놓은 듯한 좁은 길이 특징이다. 이슬람 왕조의 마지막 수도이고, 최근 드라마에 등장한 알람브라 궁전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을 널리 알린 이는 미국의 소설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이다. 그는 사실을 토대로 약간의 허구를 더해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조지 워싱턴의 전기를 써냈고, 성 니콜라스 이야기를 바탕으로 산타클로스와 관련된 이야기도 지어냈다.
그가 미국 외교 대사로 스페인에 파견 갔을 때 쓴 <알람브라 이야기>는 궁전이 문화유산이자 관광 명소로 부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세기 초반에 쓰인 이 낭만적인 에스파냐 여행기엔 지금은 진부해진 표현과 소재가 종종 등장한다(당시엔 참신했겠지만!) 클리셰는 대개 부지런하지 않은 지성에서 자라지만 때론 진실의 한 단면을 베어낼 만큼 날카롭다. 친숙한 편안함을 주기도,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신파(新派)도 한때는 새로운 물결이었다. 어빙은 그라나다 현지에 전해 내려오는 민담이나 설화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했다.
붉은 성을 보고 내려오는 길, 피부에 닿는 저녁 공기가 기분 좋다. 그라나다는 걸으면 걸을수록 걸을 곳을 내주는 도시다. 중세 무어인들의 정착지였던 알바이신 지구는 가파른 언덕 위에 있다.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보면 건너편에 알람브라 궁전이 보인다. 지는 노을은 스페인 국기 색깔처럼 붉은색과 노란색이 섞여 있다. 보름달 아래 도시가 있다. 언덕을 내려오는 길, 작은 버스는 어둡고 좁은 길을 익숙하게 달렸다. 경사가 급해지고 길이 좁아지면 속도를 줄였다. 승객을 태우려 때론 멈췄다. 눈이 서서히 어둠에 적응했다. 조금씩 빛이 보였다.
네 도시 이야기: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빛과 그림자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가 가우디의 평생 테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 내부에는 가우디를 포함해 건축과 조각에 참여한 40여 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괴테는 건축을 ‘얼려진 음악’이라 했다. 공간 안에 녹아든 리듬, 멜로디, 화음, 가사가 느껴진다. 성당 정면은 많은 질문을 끌어내는 물음표를 담고 있다. 압축과 생략으로 가득한 뒷모습은 말줄임표, 성당 내부는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느낌표다. 자신의 경험과 기술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건축물엔 ‘기도’ 비슷한 것이 담겨있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책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노건축가와 그를 경외하는 청년의 아름다운 여름날을 다룬 소설이다. 책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을 해결했을 때 ‘해(解)’라고 쓴다. 건축에는 완벽한 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해(正解)’가 아니라 해라고 한다.” 가우디는 죽기 전 자신만의 해를 찾았다고 생각했을까?
마드리드 시내엔 미술관이 무척 많다. 그중 대표적인 3곳이 프라도, 레이나 소피아, 티넨 보르네미사다. 이들을 지도상에서 연결하면 삼각형이 된다. 걸어서 이동할 수 있다. 이곳 거장의 작품을 보다 보면 각자의 개성은 추구하되 서로 영향을 받았단 게 뚜렷이 관찰된다. 예를 들어,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된 벨라스케스의 <실 잣는 사람들(아라크네의 우화)>은 베첼리오 티치아노(Vecellio Tiziano)의 <유로파의 강탈>을 인용한 것이다. 이는 다시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와 페데리코 바로치(Federico Barocci)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문예비평가인 장 스타로뱅스키는 <자유의 발명>이란 책에서 다양성과 개성에 주목[4]했다. 상반된 경향이 다양한 방식으로 경쟁하면서 시대를 뜨겁게 달구었다.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는 1936년 매거진 <에스콰이어>에 기고한 칼럼에서 “지성을 시험하는 잣대는 상반된 두 개념을 동시에 머릿속에 간직하면서도 계속 기능할 줄 아는 능력이다”라고 말했다. 특정 유파의 틀로 가둘 수 없는 창조자들의 개성과 취향이 관건이다. 동시대의 천재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고 놀랄만한 걸작을 탄생시킨다.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와 동시대에 활약한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Chrisopher Malowe)를 들어봤는가? 미국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에드워드 글레이저(Edward Glaeser)에 따르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말로의 작품을 참고한 것이다. <베니스의 상인>과 말로의 <몰타 섬의 유대인>의 연관성은 오랫동안 학자들의 연구 주제였다. 말로의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은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영향을 주었다. 말로의 <포스터스 박사>에 나오는 주인공과 <멕베스>의 선택은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천재는 이웃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차용할 정도로 충분히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는 말로 요약된다.
스페인에선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여러 왕국이 세력 경쟁과 영토 확장을 지속했다. 800년간의 이슬람 지배를 거치는 동안 반도의 여러 도시가 유럽 최대 도시로 흥했다. 페르시아부터 포르투갈에 이르는 광범위한 교역로를 열어, 상품과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교환하고 지적 유대감을 굳건히 했다. 고서적을 번역해 전 세계로 전파했다. 1492년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이 연합해 현재의 국가 형태가 갖춰졌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사벨 여왕의 후원 아래 신대륙에 닿았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은 16~17세기 황금기를 누렸다.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제국이 됐다. 산업·경제 발전뿐 아니라 회화, 건축, 문학 등 다양한 문화가 융성했다. 글 첫머리의 택시 운전사 마뉴엘이 말한 무리요와 벨라스케스는 일례일 뿐. 고야, 피카소, 엘그레코(출생지는 크레타섬), 세르반테스, 가우디 등 수많은 예술가가 이 땅에서 명멸했다.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중세 시대 지성들은 서로 연결되고 혁신 속도는 빨라졌다. 이처럼 사람들이 밀집된 장소는 혁신의 온상이 되고 지식의 교점이 된다.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책 <도시의 승리>엔 “도시는 시장과 문화를 연결하는 관문으로 이탈리아 피렌체는 르네상스를 선물했고 영국 버밍엄은 산업혁명을 가져다주었다”는 말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에스파냐의 네 도시는 시대별로 이베리아반도의 전성기를 이끄는 역할을 했다. 11세기 말 기독교 학자들은 마드리드 인근 도서관에 소장된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이 번역본은 전 세계 기독교 국가로 전파됐다. 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신설 대학에도 보내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등 여러 유럽 학자들이 그리스와 이슬람 철학을 연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성장하는 유럽의 도시를 통해 중세의 지성들은 서로 연결됐고 혁신 속도는 빨라졌다. 글레이저는 “사람들이 밀집된 장소는 혁신의 안식처였으며, 동양의 지식을 수입하는 전 세계 무역 네트워크가 만나는 교점이었다”고 강조한다.
네 도시를 관통한 테마, 다양성
최근 ‘벌집의 온도 조절; 다양성이 안정성을 촉진한다’는 제목의 <사이언스> 인용 기사를 읽었다. 다른 특성을 지닌 벌들이 동질의 (꿀벌) 집단보다 변화에 더 잘 적응하고 안정적으로 체제를 운영하는 모습이 관측됐단 내용이다. 경영 컨설턴트 헥터 맥도널드(Hector Macdonald)는 그의 책 <만들어진 진실>에서 소통을 음악의 ‘테마와 변주’에 비유한다. 작곡은 보통 테마가 되는 짧은 악상으로 시작된다. 작곡가는 그 멜로디에 음표를 더하고, 리듬을 바꾸고, 꾸밈을 넣고, 템포나 악기 구성에 변화를 준다. 변주를 통해 멜로디는 새로운 옷을 입는다. 하지만 밑바닥에는 언제나 기본 테마가 있다. 역사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스페인 역사를 관통하는 테마는 다양성이라 생각한다. 이는 여러 민족에 의해 다양한 문화로 변주돼 왔다.
여행은 시각과 후각, 그리고 미각[5]이 기억할 곳을 찾는 여정이다. 스페인어로 쓰인 소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6]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의 <백년의 고독>[7], 그리고 비교적 최근작인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Carlos Ruius Zafon)의 <바람의 그림자>[8]의 첫 문장은 ‘기억함’ 혹은 ‘잘 기억하지 못함’으로 시작된다.
나는 기억한다. 바르셀로네타 해변의 블루아워, 몬주익 분수에서 허공으로 솟구쳤다 밤하늘을 긁듯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던 물줄기, 세비야의 오래된 골목, 그라나다의 붉은 성, 마드리드의 나폴리타나스와 크로와상, 바르셀로나 벙커로 올라가는 길에 버스를 한 구역 지나칠 뻔한 걸 알려준 이의 친절함을 잊지 못한다. 대신 거리 곳곳 반려견이 남기고 간 흔적이나 솔 광장 근처 이른 새벽에 목격한 소란에 대한 기억은 잊는다.
모든 것엔 빛과 그림자가 있다. 지난 한 해를 모두 담아낸 사진엔 활짝 핀 탐스러운 순간도 있고 고슴도치마냥 가시투성이인 형상도 있다. 나무는 숲보다 빠르게 달라지고 나뭇잎은 나무보다 먼저 변한다. 소네트[9]의 마지막 2행, 발레의 마지막 장, 교향곡의 종결부, 이야기의 종장은 끝났다.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시점이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속담이 있다. 말은 쉬우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첫 단추’엔 시행착오와 실수란 구멍이 뚫려 있다. 그렇기에 속담이 제시하는 당위론과는 별개로 첫 단추를 잘 끼우는 일은 쉽지만은 않다.
한국에 돌아와 집에서 가장 큰 냄비를 꺼냈다. 템포가 느린 음악에 맞춰 떡국이 끓기 시작하면 ‘이제 새해구나’란 생각이 든다. ‘근사(近似)하다’는 말은 어떤 기준에 가깝다는 의미와 함께 훌륭하고 꽤 괜찮다는 뜻을 지닌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김민형 교수는 “과학적 시각이란 진리를 ‘근사(approximation)’해 나가는 과정, 완벽하진 않고 나중에 뒤집어지더라도 제한 조건 속에서 이해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말했다. 올 한 해가 ‘정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저마다의 ‘최적 해’를 찾는 해가 되었으면 한다. 2019년이 우리 모두에게 제법 근사한 해가 되기를 소원한다.
[1] 찰스 디킨스의 책 <두 도시 이야기>에서 빌려 온 표현. 세비야, 그라나다, 바르셀로나, 마드리드를 말한다
[2]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 1617년 12월말 ~ 1682년 4월 3일). 스페인 바로크 화가. 세비야 미술관에선 그가 태어난 지 4백주년을 기념하는 전시가 한창이다
[3]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1599년 6월 6일 ~ 1660년 8월 6일). 스페인의 화가. 독특한 구도로 다양한 해석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 <시녀들>이 대표작
[4] 회화에선 이탈리아 양식과 플랑드르 양식이 경쟁하고 음악 분야에선 멜로디와 화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고딕주의와 고전주의의 병존, 대륙과 섬과 반도식 정원의 공존 등 수많은 다양성이 유럽 예술의 활력이자 매력이다
[5] 어느 나라에 가든 가급적 현지 음식을 먹으려 한다. 하지만 어느 곳에 가든 반드시 먹어야 할 음식은 없다. 다만 개인의 취향에 따라 경험하면 좋을 것은 있다. 스페인을 떠나는 날, 마지막 저녁은 한식을 먹고 싶었다. 일행 중 영국으로 돌아가는 이가 있어서 그랬다. 홀 주문은 필리핀인 사장이, 주방은 한국인이 담당하는 가게였다. 주문한 뜨끈한 곰탕 국물이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김영탁 작가의 <곰탕>이란 소설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아무 것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든 걸 동경하거나 무엇도 기대하지 않게 된다.” 깨달음이 그렇다. 깨닫기 전엔 인생이 편하다. 하지만 깨닫고 나면 걸리는 게 많아진다. 깨달았으니 똑같이 살면 안 되는 것 같다. 깨닫고 나면 그 이전에는 남에게 듣던 질문을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6]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얼마 전 라만차 지역,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어느 마을에 몰락한 시골 귀족이 살고 있었다” (<돈키호테>의 첫 문장, 미겔 데 세르반테스)
[7]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총살형 집행 대원들 앞에 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아버지를 따라 얼음 구경을 갔던 먼 옛날 오후를 기억해야 했다” (<백년의 고독>의 첫 문장,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8] “나는 지금도 아버지가 ‘잊힌 책들의 묘지’로 나를 처음 데려간 그 새벽을 기억한다” (<바람의 그림자>의 첫 문장, 카를로스 루이스 샤폰)
[9] 유럽 정형시의 한 가지
삼성전자 뉴스룸의 직접 제작한 기사와 이미지는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성전자 뉴스룸이 제공받은 일부 기사와 이미지는 사용에 제한이 있습니다.
<삼성전자 뉴스룸 콘텐츠 이용에 대한 안내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