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당신도 ‘싫어증’ 환자?! ‘그림왕 양치기’, 양경수 작가를 만나다
매주 돌아오는 일요일 저녁. 애써 시간 따위 잊고 ‘월요병’ 같은 건 없다며 잊으려 하지만, 이 시간만 되면 우울하다. 빛의 속도로 지나가는 주말 밤을 부여잡고 있는 우리에게 누군가 다가와 다정하게 속삭인다.
소곤소곤, 월요일이야!
▲‘약치기 그림’ 중 가장 싫은 한 컷. 빛의 속도로 도망가는 일요일 밤을 눈물로 부여잡고 있는데, 누군가 굳이 귓속말로 알려준다, ‘월요일!’ 그림 한 장의 전달력이 어떻게 이렇게 강력할 수 있는지,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어진다.
일요일 저녁, 누군가 내 귀에 대고 나지막이 ‘월요일!’이라고 속삭인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는 그림이다. 어쩌면 한 컷의 그림이 이렇게 강력할 수 있는지! 최근 SNS에서 삽시간에 퍼진 <약치기 그림> 일부다. ‘직장인 사이다 그림’으로 더욱 잘 알려진 이 그림의 원작자는 누구일까? 직장 경험 많은 40대 웹툰 작가를 상상했지만, 원작자 ‘그림왕 양치기’는 직장생활 경험이 없는 1984년생 현대미술가다. 이보다 더 시원할 수 없는 한 방, ‘직장인 사이다’ 양경수 작가를 만나 보았다.
“직장생활 경험이 없다고요?” 사회생활 14년 차의 ‘사이다 풍자’
▲14년 사회생활 시원하게 녹여낸 ‘그림왕 양치기’, 양경수 작가. 직장생활의 핵심만 콕콕 짚어 그린 ‘그림왕 양치기’는 양경수 작가의 필명이다. SNS에 올리던 직장인 이야기가 포털에 소개되면서 <약치기 그림>은 직장인을 중심으로 삽시간에 퍼졌다.
책 발간, 웹툰 연재, 각종 방송과 미디어 인터뷰에 급기야 드라마 삽화 작업까지.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양경수 작가로부터 ‘정확한 일정과 내용을 알려주면 인터뷰하겠다’라는 답변이 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끼, 끼, 끼! (사진 오른쪽이 양경수 작가) 전 세계를 아우르는 전시에 강연, 업무 미팅까지 하다 보면, 정작 그림 그릴 시간은 밤 밖에 없다. 광고 제의만 수백 건에 달하는 요즘, “제가 그림으로 먹고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며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하루를 쪼개고 쪼개 쓰는 양 작가가 잠자는 시간은 서너 시간에 불과하다.
이사 온 지 4개월 됐다는 영등포구의 한 오피스텔이 그의 집이자 작업공간이다. 널찍한 나무 테이블 뒤에는 선글라스를 끼고 디제잉을 하는 석가모니 부처님 그림이 걸려있었다. 양경수 작가를 본 첫인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끼, 끼, 끼!’다.
“제가 사실은 이 불교미술이 싫어서 집을 나왔는데, 어릴 적부터 보고 배운 게 불교미술이라 이렇게 또 인연이 닿네요. 아버지는 단청 기술자시고, 어머니는 불교 미술 작가십니다. 저는 단청이나 탱화를 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을 들어가자마자 단돈 2만 원을 들고 집을 나왔어요. 스무 살부터 친구 집에 살면서, 먹고 살려고 안 해 본 일이 없었죠. 클럽 아르바이트, 홍대 액세서리 노점상, 대리운전, 인테리어까지요. 그런데 유화만 그려서는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2012년 컴퓨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제가 웹툰 작업에는 잘 안 맞더라고요. 한 번에 백 몇 컷 못 그리겠어요, 저는. 그래서 ‘나에게 맞는 나만의 작업을 해 보자’ 하면서 시작하게 된 게 이 ‘불교 현대미술’이에요.”
단청 기술자 아버지와 불교 미술 작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양 작가에게 불교는 가장 친숙한 종교이자 철학이었다. 불교에 매력을 느껴 공부를 시작한 양 작가는 불교를 자신의 감각에 맞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했고, 그 반응은 해외에서 먼저 왔다.
▲디제잉 하는 부처님, <팔상도(八相圖)>. 동서고금을 절묘하게 섞어 놓은 듯한 이 작품은 대한민국 대표로 국보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과 함께 네덜란드 국립세계문화박물관 <THE BUDDHA> 전에 초청 전시됐다. 양 작가는 유명 아트스쿨을 나오지 않아도 자신만의 개성이 있다면 세계 무대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알게 됐다.
양 작가의 그림에는 동서고금이 절묘하게 녹아있다. 불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그의 그림은 2015년 네덜란드 국립세계문화박물관 <THE BUDDHA> 전에 초청받았고, 국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로 전시됐다. 현대미술을 하던 그가 어떻게 직장인 이야기를 그리게 됐을까?
“집을 나오면서 먹고 살려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제 나이가 벌써 서른넷이니까, 사회생활만 벌써 14년째예요. 제 친구들도 삼성전자에 많이 다니고 있는데, 직장생활이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친구들한테 들었던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그려서 SNS에 올리기 시작했는데, 한 70번째 그림이었나? 그즈음 각종 포털 사이트와 출판사가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어요.”
0.5초 만에 풉!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웃기는데 왜 슬프죠?”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화장실에서 보던 <덩달이 시리즈>나 <최불암 시리즈>, <논리야 놀자>와 같은 책을 만들자!” 양경수 작가와 출판사가 정한 책의 콘셉트였다. 0.5초 만에 빵! 터지긴 하는데, 왜 이리 슬픈 건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직장인 야생 라이프는 볼수록 매력 터진다.
자꾸만 어지럽고, 일도 손에 안 잡히고, 현실에서 도피하고만 싶다. 매사에 의욕이 없으니 말도 안 나오고, 매일 아침 ‘반차’ 생각이 간절하다.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월급이라는 녀석은 오늘도 ‘스치듯 안녕!’
도대체 얼마나 예리해야 이런 컷들이 나오는지. 컷마다 내 맘 같다. 마치 직장인들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한 마디 한 마디가 구구절절하니, 이 어찌 퍼가지 않으리오! 얼마나 연습을 해야 한 컷에 사람 마음을 꿰뚫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일까?
“정답은 이미 나왔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처음부터 잘됐던 건 아니죠. 처음에 못 했으니까 두 번 그렸고, 두 번 그려서 안 되니 세 번 그렸죠. 처음부터 되는 건 없어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죠. 14년 동안 그리고 또 그리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거예요. ‘3대째 맛집’도 3대째 하니까 그 맛이 나오는 거예요. “와! 이 집이 맛집이래!” 하면서 레시피만 따라 하면 그 맛이 나올까요? 저도 얼마나 많이 메모하고, 상황 정리도 많이 하는데요.”
▲먹고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뭐든지 해야 했던 대학 시절. 그림으로 돈을 벌기 어려웠던 그때, 노점상부터 대리운전까지 마다할 수 없었다. 이렇게 고생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그림을 ‘업’으로 삼을 수 있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양경수 작가는 현대미술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을 다스리다’라는 뜻의 ‘그림왕 양치기(梁治己)’라는 필명을 쓴다. 양 작가는 그림을 ‘수련’이라고 말한다. 직업을 ‘수련’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냥 회사 다녀요…”가 만드는 공식, ‘일 = 스트레스’
▲“무슨 일 하세요?”라 물으면 “그냥 회사 다녀요”라 말하는 우리. 마치 등에 바코드가 찍힌 양, 딱! 딱! 딱! 자꾸만 기계적으로 일하다 보니, 쌓여 가는 것은 무기력이요, 잊어가는 건 꿈이로세! 우리에게 꿈이 있었던가!
취업하기 어려운 세상, 안정적인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것만큼 행복하고 감사한 일도 없는데, 누군가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물으면 ‘그냥 회사 다닌다’라고 답한다. ‘일 = 스트레스’라는 공식은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것일까?
“직업의 정의가 뭘까요? 직업의 사전적 의미. 우리는 직업을 구하면서 직업의 사전적 의미도 몰라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능력과 적성에 맞게 일정 기간 종사하는 일’이 직업의 정의예요.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물으면 “그냥 회사 다녀요” 혹은 “삼성 다녀요”라고 답해요. 무슨 일 하냐고 물어봤는데 ‘어디 다닌다’라고 이야기해요. “무슨 일 하세요?” 물으면, “저는 핸드폰 개발하는 일을 해요”라든가 “핸드폰 디자인해요”라는 말이 나와야 하죠. “아, 어디서 일하시는데요?”라고 했을 때 “삼성전자요”라고 하는 게 자연스러운 대화인데 말이죠. ‘그냥 회사’가 어디 있어요. 사람이 다 다르고, 삶이 다 다른데.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까 더 스트레스받는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세상에 재미없는 삶은 없어요.”
▲‘수련’하다 나온 컷들, ‘불편한 진실’. “아코! 기분 좋아?” 하지만 실은 굉장히 불편하고, “걸음마~ 하나~ 둘, 하나~ 둘!” 하지만 실은 12개월 된 아기도 진짜 쉬고 싶은 날이 있는 법. 일을 수련이라 생각하니, 재미있고, 재미가 있느니 반전이 있다.
양 작가가 직장인들에게 들었던 가장 안타까운 말은 “그냥 회사 다녀요…”다. 양 작가는 직’업’이 아니라 직’장’을 찾는 우리들의 모습에 일침을 가했다. 실제 쓰는 단어도 ‘직업인’이 아니라 ‘직장인’이다.
“만화 <원피스> 보세요? 그 만화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수련해요. 조로는 끊임없이 칼 다루는 법을 배우고, 루피는 고무공을 수련해요. 조로는 쉴새 없이 팔굽혀펴기 하고, 상디는 계속 요리만 해요. 각자 자기 분야에서 수련합니다. 저는 그림이 제 주특기니까, ‘그림왕’이 되려면,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그림을 어떻게 그릴 것인지, 어떻게 하면 그림 그리는 시장을 넓힐 것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수련해야 해요. 그래야 또 제 후배를 키워 나갈 수도 있고요.”
그림이 직업이니 ‘그림왕’이 되겠단다. ‘양치기 공식’에 대입을 해 보면, 개발자는 ‘개발왕’, 마케터는 ‘마케팅왕’, 기획자는 ‘기획왕’, 디자이너는 ‘디자인왕’, 제조 담당자는 ‘제 왕’을 목표로 수련하는 것이다. 그림 수련을 하는 ‘그림왕’도 매너리즘에 빠질 때가 있을까?
“(매너리즘에 빠질 때가) 있죠. 저도 그림 그리는 삶은 오래됐지만, 그림으로 이렇게 많은 대중을 만나고 돈을 벌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이제 4~5개월 됐는데, 저도 찾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즐겁게 작업을 할지. 요즘 진짜 스트레스 많거든요. 저도 찾고 있으니까 정답은 드릴 수 없어요. 부처님이 와도 못 주시죠. 그런데 이런 건 있습니다. 저는 작업하는 모니터를 3개를 써요. 작업 할 때 저는 한 번에 두세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해요. 이 그림 그리다 지겨우면 저 그림 그리고, 저 그림 그리다 지겨우면 또 다른 작업을 해요. 술을 마시거나 게임을 하는 게 아니고요. 예를 들어 <약치기 그림> 그리다가 지겨우면 일러스트 작업을 하거나, 로고를 만드는 일을 해요. 늘 그래왔어요. 쌀밥이 질렸다고 굶거나 갑자기 빵이나 고기만 먹는 것이 아니라, 쌀밥이 질렸을 때 보리밥도 먹고, 콩밥도 먹고 이렇게요.”
하늘 아래 나만? 천만의 말씀, ‘내가 귀하면 남도 귀하다!’
양 작가는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그릴지’, ‘어떻게 하면 그림 그리는 시장을 넓힐지’, ‘어떻게 하면 그림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을 만들지’가 요즘 가장 큰 고민이다. 이것이 그가 일을 ‘수련’이라 일컫는 이유다. ‘어린 나이에 성공한 작가’라는 인식이 깨지는 순간이다.
그런 양경수 작가가 요즘 더욱 공들이는 작업이 있다. 직업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은 <JOB多한컷>이다.
▲직업별로 애환을 담은 웹툰 <JOB多한컷>. 대한민국에는 직업에 대한 선입견이 너무 강하다. ‘승무원은 예쁘게 꾸미고 웃어나 주는 사람’이 아니고, ‘소방대원은 취객을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고, ‘택배기사는 당신이 막 대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며 그림으로 말하고 있다.
은행원, 승무원, 소방대원과 택배기사. 이 세상에 나쁜 직업은 없고, 힘들지 않은 직업도 없다. 한 컷의 웹툰으로 이런 편견을 깨고 싶었다고. 그리고 이것은 양 작가만의 ‘전투’이기도 하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이 그림의 이름은 <하늘바다나무 버스>다. 흙으로 된 버스 바닥에는 나무가 심겨 있고, 플라스틱 손잡이 대신 까슬한 나뭇가지가 손잡이다. 뻥 뚫린 버스 천장으로 바람 냄새가 좋은, 그런 세상을 꿈꾼다.
“유럽이 불교에 심취한 가장 큰 이유는 가장 개인주의적인 철학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에서는 잘못 인식이 돼 있어서 ‘나만 잘살면 돼’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개인주의는 ‘내가 싫으면 얘도 싫어, 내가 좋은 건 얘도 좋아’라는 생각에 가까워요. 그러니 서로 다른 사람이 싫어할 수 있는 행동은 조심하고,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상대방도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은 ‘하늘 아래 나는 오직 나일 뿐’이라는 뜻인데, 개개인의 시각에서 보면 모두 소중한 존재죠. 이런 개념은 회사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귀한 존재면, 후배도 귀한 존재고, 후배가 귀한 존재면, 상사도 귀한 존재죠. 서로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해요.”
양경수 작가는 지금 그림 수련으로 세상과 전투 중이다. 언젠가 될 ‘그림왕’을 꿈꾸며. 하루하루, 괴롭고, 힘들고, 지친 날들의 연속이라 불만을 늘어놓기보다는, 개발 수련, 마케팅 수련, 기획 수련, 디자인 수련, 제조 수련을 한다는 생각으로 조금 색다른 하루를 살아보면 어떨지! 뭐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냐 만은, 이 젊은 작가의 ‘수련법’을 꼭 한번 도전해보면 좋겠다.
*본 기사는 삼성전자 사내 커뮤니케이션 채널인 ‘삼성전자 LiVE’에 발행된 기사를 재가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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