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6부작 특별 기획 ‘IT로 문화 읽기’_⑤취향 IT가 가능케 한 자유와 관용의 세계_‘취향’이라 쓰고 ‘똘레랑스’라 읽는다

201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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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가 가능케 한 자유와 관용의 세계, 취향이라 쓰고 똘레랑스라 읽는다. 6부작 특별 기획 IT로 문화코드 읽기. 5. 취향. 스페셜 리포트는 풍부한 취재 노하우와 기사 작성 능력을 겸비한 뉴스룸 전문 작가 필진이 새롭게 선보이는 기획 콘텐츠입니다. 최신 업계 동향과 IT 트렌드 분석, 각계전문가 인터뷰 등 다채로운 읽을거리로 주 1회 삼성전자 뉴스룸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 집에 어디 내가 고른 물건 하나 있어? 내가 좋아하는 거 하나쯤 놔두면 안 되냐고. 여긴 완전히 인형 가게 같아. 핑크색에 온통 새 그림, 꽃 그림. 더 이상은 못 참아.”

기업체 사장인 ‘카스텔라’는 문화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생전 연극을 본 적도, 소설을 읽은 적도, 그림에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다. 그의 아내 ‘안젤리크’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남편과 달리 매우 고급스러운 취향을 갖고 있다 자부하는 그는 집을 온통 핑크빛과 꽃무늬로 꾸며놓는다.

침실의 모습입니다. 형형색색의 침구류와 예쁘게 꾸며진 벽면이 보입니다.

어느 날, 카스텔라는 우연히 연극 한 편을 보게 되고 주연 배우 ‘클라라’에게 마음을 뺏기며 문화 생활에 눈을 뜬다. 그는 마음에 드는 회색 추상화를 한 점 구입해 집에 걸어놓지만 사사건건 남편을 무시하는 안젤리크는 그림을 치워버린다. 위 대사는 카스텔라가 분통을 터뜨리며 외치는 말이다.

아내와의 갈등 속에서 카스텔라는 서서히 자신의 문화적 취향을 찾아가고, 클라라는 그 취향이 자신과 다르지만 뭔가 진정성 있다고 이해한다. 결국 카스텔라는 집을 나와 클라라를 찾아가는데….

이상은 프랑스 영화감독 아네스 자우이(Agnes Jaoui)의 1999년작 ‘타인의 취향(Le goût des autres)’ 줄거리다. 뭔가 공감이 가지만 딱히 특별하달 것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이들의 삶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을 다룬 저예산 영화다. 하지만 이 작품은 유럽을 비롯, 선진국을 중심으로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 비결을 이해하려면 유럽 문화에서 ‘취향’이란 개념이 어떤 작용을 해왔는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서구 문화권의 취향, ‘구별 짓기’서 ‘똘레랑스’로

취향은 서구 언어권에선 ‘입맛’이란 단어로 표현된다. 영어의 ‘테이스트(taste)’나 불어의 ‘구(goût)’, 혹은 독일어의 ‘게슈마크(Geschmack)’는 모두 ‘입맛’이란 뜻의 단어지만 확대돼 ‘취향’이란 의미로도 쓰인다.

입맛과 취향은 비슷한 점이 많다. 우선 사람마다 상당히 다르다. 대형 쇼핑몰의 푸드코트에 가보면 그 많은 메뉴 중 ‘나’는 평생 주문하지 않을 것 같은 물건이 많지만 그걸 시켜 먹는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의류나 옷, 장신구를 파는 공간에선 상상을 초월한 디자인의 아이템도 많다. 저런 걸 누가 사나, 싶어도 다 나름의 취향을 지닌 이들에게 팔려나간다.

하지만 입맛과 취향은 결정적으로 다르기도 하다. 입맛은 비교적 평등하다. 음식엔 상대적으로 ‘고급’과 ‘저급’이 있지만 입맛에 관해 최소한 구조적 불평등(어떤 사람은 고급 음식만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저급 음식만 좋아하는)은 존재하지 않는다. “입맛이 저급하다”는 이유로 무시 당하거나 “고급스런 입맛을 갖고 있다”고 존경 받는 일도 없다.

반면, 취향은 고급과 저급이 비교적 뚜렷이 갈린다. 그리고 이는 알게 모르게 심리적 차별의 원인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클래식 음악에 대해 제법 전문적 식견을 지니고 여기에 더해 클래식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값비싼 장비와 환경까지 갖춘 사람 중 상당수는 관광버스에서 흘러나오는 저예산 리믹스 음악에 대해 ‘경멸감 깔린 반감’ 같은 걸 보인다. 딱히 음악에 조예나 관심이 없다 해도 싸구려 리믹스 음악을 즐기는 사람보다 클래식 음악에 조예를 갖춘 사람이 더 고급스러운 취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일반적일 것이다.

바이올린과 기타가 저울에 올라가 있습니다.

사실 이 같은 차별의 역사는 꽤 오랜 것이다.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품격 있는 예술 작품의 기준(심미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2000년 전 고대 로마 정치인이며 당대 최고의 연설가∙문필가로 이름을 날렸던 세네카(Seneca)는 “로마 시민들의 저급한 음악과 향락적 취미를 견딜 수 없다”는 불평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때부터 이미 취향은 누군가의 출신이나 교양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이 돼온 것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며 이런 통념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나타났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취향을 “특정 인간 집단이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다른 인간 집단과 엄연히 구별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내고 동원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여전히 학문적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랜 세월 그래왔듯 취향으로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고 있었다.

영화 ‘타인의 취향’은 이 같은 부르디외의 학문적 통찰을 대중적으로, 또 시각적으로 보여줬다. 이후 이런 메시지를 담은 콘텐츠가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분명히 말한다. “취향이란 다른 사람을 폄하하거나 핍박하기 위한 근거가 돼선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의 취향은 존중돼야 한다.” 취향 면에서도 다른 사람을 ‘관용’해야 한다는 ‘똘레랑스(tolerance)’의 움직임이 점점 확산되는 셈이다. 그와 동시에 다양한 취향을 담은 작은 목소리와 몸짓들이 문화계 전체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2. IT, 서로 다른 이들의 취향에 ‘날개’ 달아주다

최근 서촌이나 홍익대학교 인근, 방배동 사이길, 서울숲 인근 골목길 등을 걷다보면 예상치 못했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감각적 간판, 나름대로 미적 취향을 갖고 있다 자부하는 이의 발걸음을 절로 멈추게 할 만한 정감 어린 가게가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그런 매장은 대개 넓지 않은 공간에 작업장과 전시 공간, 티 테이블 등이 빼곡하게 자리 들어차 있다. 서점 ‘오프 투 얼론’, 캔들 공방 ‘베르씨 빌라쥬’, 목공 공방 ‘웜’(이상 서촌), 북카페 ‘빨간 책방’, 도자기 공방 ‘스톤’(이상 홍익대학교 앞), 방배동 가죽 공방 ‘옥토’, 주얼리 공방 ‘수메이드(이상 방배동)…. 모두 여가 시간에 들러보기 좋은, 재미와 따스함을 갖춘 공간이다.

서울 서촌에 위치한 목공 공방 ‘웜’ 전경. ▲서울 서촌에 위치한 목공 공방 ‘웜’ 전경. 최근 서울 시내 곳곳엔 이처럼 ‘작지만 개성 만점인’ 공간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작은 공간, 그리고 (백화점이나 전문 매장에 비하면) 훨씬 적은 물품 수. 전통적 기준으로 봤을 때 도저히 사업장으로 보이지 않지만 모든 아이템이 각각 저만의 특색과 스토리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도 이들 공간의 특징 중 하나다.

‘작은 가게’는 지난 회차 리포트에서 소개했던 신개념 생산∙소비 문화 주체 ‘크리슈머(cresumer)’들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 생산 규모가 일정 규모 이상 돼야 수익이 발생한다는 이론)’란 통념을 지닌 이에게 이 같은 공간은 ‘경제 활동 기반이 되지 못한다’고 일축해버릴 법하지만, 이런 공방이 자꾸 생겨나는 사실 자체는 ‘더 이상 규모의 경제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생산 유형’이 있다는 걸 말해준다.

새롭게 등장한 생산 유형은 정보기술(IT)의 발달로 인해 가능해졌다. 예전 같으면 오직 오프라인 매장 고객의 선택으로 상품 판매가 가능했었다. 따라서 매장이 크고 교통이 편리한 곳에 위치해 있으며 다양한 상품을 다수 갖추고 있을수록, 한마디로 사업 규모가 클수록 유리했다.

키보드가 보이고 그 위로 세개의 쇼핑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업 규모가 모든 걸 말해주던 시대는 지났다. SNS나 (마이크로)블로깅 등을 통해 소량이지만 심도 있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폭넓게 공유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전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도 가능해졌다. 인터넷으로 아이템 사진을 공유하면서 마음에 들면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오는 손님도 늘었다. 김연경 목공 공방 ‘웜’ 대표는 “고객 대부분이 블로그에서 정보를 얻어 우리 매장을 찾는다”며 “나도 블로그를 운영하긴 하지만 워크숍을 운영하고 작품을 만드느라 많은 시간을 내지 못하는데, 매장 방문 고객이 자신의 블로그에 공방 사진과 방문기를 올리면 그걸 본 다른 고객들이 다시 공방에 찾아오거나 인터넷으로 주문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의 발달은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준다. 가게 주인과 고객이 SNS로 시간을 정해 필요한 시간에만 가게를 열고 나머지 시간엔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심지어 매장 운영자와 고객 간 물리적 거리가 꽤 멀어도 소통과 매매를 진행하는 데 별 문제가 없다.

경기 양평군에 위치한 카페 ‘콘텐츠 원’의 전경 ▲경기 양평군에 위치한 카페 ‘콘텐츠 원’의 전경

경기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이 일대엔 북한강을 끼고 아름다운 카페들이 즐비하다. 레저 문화가 붐을 일으키며 한때 많이 생겼다가 한동안 주춤했는데, IT의 도움으로 새로운 카페 이용 패턴이 늘기 시작하고 있다. 이곳에서 ‘콘텐츠 원(Contents One)’이란 콘텐츠 카페 겸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이영아 대표는 자신도 이곳에서 작업을 하지만, SNS를 통해 예약 신청을 받아 공간을 대여해주기도 한다. 야외 공간까지 활용할 수 있고 취사는 물론, 숙박도 가능한 이곳은 다양한 콘텐츠 사업 종사자의 워크숍 진행 장소와 창작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요컨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소규모 매장 △다품종 소량 제작 방식 △수(手)제작으로 탄생한 ‘원 디자인, 원 프로덕트(one design, one product)’를 표방한 일명 ‘마이크로 프로듀싱’ 방식이 ‘대마불사(大馬不死)’로 대표되던 규모의 경제학 통념에 당당히 맞서고 있다. IT의 도움이 없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3. 마이크로밸류 마케팅 시장은 진화한다, 쭉!

‘작은 취향 누리기’가 가능해지면서 대규모 상품 생산이 충분히 가능한 업체도 일명 ‘마이크로밸류(micro-value) 마케팅’에 속속 뛰어들고 있다. 매년 1월과 9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인테리어 디자인 부문 세계 최대 박람회 ‘메종 오브제(Maison & Objet)’의 올해 주제는 ‘소중한 것(The Precious)’이었다. ‘대중성보다 각자에게 소중한 걸 중시하자’는 취지다. 이번 행사에선 특정 건물의 실내만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인테리어 자재나 소품 등이 소개돼 ‘희소성 자체가 상품화되는’ 추세를 반영했다.

아이디어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크라우드펀딩의 도식화 이미지입니다.

자본이나 물리적 공간 등 사업 기반이 부족해도 가치를 창출할 수만 있다면 실제 사업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지원이 적지 않다. 지난 회차 리포트에도 잠깐 언급됐던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이 대표적 예다. 이제 IT를 통해, 마음 맞는 사람끼리 물리적 공간을 초월해 함께 나줄 수 있는 세상이 됐다. IT의 발달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미세한 가치를 되살리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앞으로의 세상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정교한 가치가 공존하는 ‘풍부한 생태계’로 변모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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