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가 사라진 시대, 인간의 기억이 위험하다?!

2017/09/28 by 박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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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물과 백두산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애국가 1절 가사다. 이때 ‘기억한다’는 건 ‘동’과 ‘해’의 소리 세기 간, ‘해’와 ‘물’의 발음 세기 간 상대적 관계를 각각 자동으로 떠올리는 일이다.

기억의 본질은 ‘서열화된 패턴(pattern)’이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사건(사물)의 관계를 기억한다. 관계는 일정한 맥락 아래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즉 맥락이 사라지면 관계도 사라진다. 사건의 구성 요소의 시간 순서와 사물 배치의 상대적 관계가 기억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기억의 본질은 ‘서열화된 패턴(pattern)’이다. 패턴은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사건(혹은 사물)의 공통 요소인 동시에 지각 경험의 범주화된 형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변하지 않는 사건(혹은 사물)의 관계를 기억한다. 관계는 일정한 맥락 아래서 의미를 획득한다. 즉 맥락이 사라지면 관계도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맥락적 관계는 단어란 상징으로 기억되고, 의미 기억은 전부 상징으로 표상된다. 사건 구성 요소의 (변하지 않는) 시간 순서와 사물 공간 배치의 상대적 관계가 기억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태·정·태·세·문·단·세…’가 좀처럼 안 잊히는 이유

기억의 매커니즘

사건 기억의 특징은 순서로 배열할 수 있단 것이다. 학창 시절, 국사 시간에 배운 지식 대부분은 이미 잊혔지만 ‘태·정·태·세·문·단·세…’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왕 이름의 머리글자는 평생 기억할 수 있다. 반면, 단어를 역순(逆順)으로 기억하긴 매우 어렵다. 의미 기억은 언어로 표현되는 기억이며, 언어는 음소·단어·문장의 순차적 배열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인간 뇌는 시∙공간 지각에서 변하지 않는 관계를 반복적으로 경험, ‘불변표상’으로 범주화한다. 사과를 예로 들면 다양한 종류의 사과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사과의 전형, 즉 범주화된 사과를 기억 계측 구조 상단에 저장하는 것이다

사건의 시간적 순서는 인과관계를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사물의 공간적 관계는 장면을 구성한다. (시·공간이 어우러진) 일화 기억이 사건(사물)의 인과적 맥락과 장면을 담고 있는 이유다. 인간 뇌는 시·공간 지각에서 변하지 않는 관계를 반복적으로 경험, ‘불변표상’으로 범주화한다. 사과를 예로 들면 다양한 종류의 사과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사과의 전형, 즉 범주화된 사과를 기억 계측 구조 상단에 저장하는 것이다. 반대로 하향적 처리 과정에선 전전두엽의 ‘개념’ 영역에서 사과의 추상적 형태가 선택돼 뇌 연결망을 자극, 구체적 사과 모양을 떠올리게 한다.

ask - think - do

사건 기억의 여러 단계 중 ‘(새로운 기억이 이전 기억과 결합하는)부호화 과정’과 ‘(단백질 합성을 거쳐 장기 기억으로 전환되는)공고화 과정’은 해마와 전전두엽 간 상호연결을 통해 진행된다. 공고화 과정으로 감각 연합피질에 기억이 저장된 후엔 해마가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해마에서 연합피질로 이동된 기억의 흔적은 해마가 조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해마는 기억 인출 과정에서 다시 관여한다. 해마는 신피질에 기억이 옮겨진 후에도 해당 기억과 연결된 흔적을 갖고 있어 인출 단서를 만나면 전전두엽과 함께 작용, 기억 전체를 회상하도록 돕는다.

나이 들수록 세상이 덜 낯설어지는 건 ‘기억’ 덕분

다양한 사물은 한번에 기억하기 힘들다

해마는 이미 경험한 사건을 기억으로 만든다. 하나의 사건을 구성하는 장면은 (배경) 장소와 사물로 구성된다. 공간적 시·지각이다. 시각 처리 과정에서 일정 형태를 갖는 사물은 배경에서 분리된다. 1차 시각피질의 신경세포들은 방향이 연속적으로 변하는, 분리된 선분(線分)에 민감하다. 이 선분이 바로 사물의 윤곽선이다. 선분이 다양한 방향으로 흩어져 있는 경우, 인간은 특정 형태를 감지하지 못한다. 반면, 분산적 선분의 혼란 속에서 ‘인접하며 방향이 동일한’ 선분의 집합은 사물 윤곽선으로 쉬 드러난다.

배경을 구성하는 선분에서 일정한 경향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전경을 구성하는 사물의 윤곽선은 유사·근접·연속 등의 속성을 갖는다. 시각적으로 형태의 항등성[1]이 확보되면 사물 고유의 범주화된 표상이 생겨난다. 해마에선 개별 사물에 대한 지각 정보가 연속적으로 입력되기 때문에 사물 지각 정보 유형에 대한 공간적 분리는 필수다. 사건 역시 시간적으로 구별해야 한다(이 작업은 전전두엽이 생성하는 시간의식의 몫이다).

경험이 저장 절차 없이 바로 잊히면 인간에게 세상은 늘 낯선 곳이다. 기억이 사라진 세계 역시 익숙지 않은 타인으로 꽉 찬 형태일 수밖에 없다. 기억이 생성되지 않아도 생존 자체엔 별 문제가 없지만 그런 사람에게 ‘(의미 있는) 관계 형성’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건 기억이 생각이나 행동의 재료가 되려면 일단 장기 기억으로 전환, 저장돼 언제든 인출 가능한 상태로 바뀌어야 한다. 경험이 저장 절차 없이 바로 잊히면 인간에게 세상은 늘 낯선 곳이다. 기억이 사라진 세계 역시 익숙지 않은 타인으로 꽉 찬 형태일 수밖에 없다. 물론 기억이 생성되지 않아도 생존 자체엔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 ‘(의미 있는) 관계 형성’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매 순간 그저 반사적 행동만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 지능은 ‘반응을 지연하는 두뇌 작용의 산물’

사람은 뇌가 경험한 기억을 꿈을 통해 변형, 저장한다

축적된 기억은 느낌을 지속시킨다. 욕구 증가에도 기여한다. 사건 기억이 공고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편도체에서 해마로 노르에피네프린[2]이 분비된다. 중요한 소식을 듣고 놀랄 때 주변 상황까지 세세하게 기억에 남는 건 그 때문이다. 편도체의 놀람 반응이 해마와 연결, 해마가 그 상황을 기억으로 각인시키는데 이게 바로 노르에피네프린의 작용 덕분이다. 꿈이 놀라운 상황의 연속인 것 역시 ‘뇌가 경험한 기억을 정서적으로 변형, 기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의 모습

이처럼 기억과 정서(적 느낌)는 서로 깊이 연관돼 있다. 그래서 기억을 잘하는 방법 중 가장 좋은 건 기억하고자 하는 대상에 강한 정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정서는 기억을 돕고 행동을 촉발한다. 뭔가 경험해도 좀처럼 기억되지 않고, 마주하는 사람 수는 많지만 대부분 잊히는 세상이다. 아무리 떠올려도 남는 건 순간적 감각뿐이다.

인간은 장기 기억을 활용, 즉각적 반응을 억제할 수 있다. 즉각적 반응이 지연되는 동안 인간의 뇌는 지각을 만든다. 기억을 바탕으로 보다 적절한 행동을 선택하기도 한다. 실제로 인간 지능의 핵심 요소인 주의 집중, 그리고 언어는 둘 다 일정 시간이 소요되는 뇌 작용이다

순간적 감각 자극에 반사적 동작으로 일관되게 응수하는 건 동물 세계의 특징 중 하나다. 동물은 기억 기능이 약하고, 기억이 없으면 감각 입력에 대한 반응 지연이 어려워진다. 반면 인간은 오래 지속되는 장기 기억을 활용, 즉각적 반응을 억제할 수 있다. 지연된 반응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즉각적 반응이 지연되는 동안 인간의 뇌는 지각을 만든다. 기억을 바탕으로 보다 적절한 행동을 선택하기도 한다. 실제로 인간 지능의 핵심 요소인 주의 집중, 그리고 언어는 둘 다 일정 시간이 소요되는 뇌 작용이다. 그리고 인간이 즉각적 반응을 멈추는 동안 뇌는 다양한 기억을 조합해 최적의 행동을 도출한다. 이렇게 볼 때 인간 지능은 결국 ‘반응을 지연하는 두뇌 작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뇌의 기능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1] constancy. 환경 조건이나 제시 방법이 달라져도 물체의 속성을 비교적 일정하게 지각하는 현상
[2] norepinephrine. 교감신경계의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으로 작용할 수 있는 물질

by 박문호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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