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일이 뜻대로 안 될 땐 생각해라, 당신이 과거보다 얼마나 발전했는지”_진용완 마스터 편
언제부턴가 제겐 습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매일 아침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일을 시작하기 전, 책상머리에 놓아둔 잠언집 한 구절을 읽는 겁니다. 이렇게 하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정신이 맑아져 그날 하루가 더욱 생산적으로 돌아갑니다.
마스터 칼럼을 준비하며 문득 오늘 아침 읽은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평소 좋아하던 문구 중 하나이기도 한데요. “갈 길이 너무 많이 남아 포기하고 싶을 땐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왔는지 돌아보라.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조차 과거보다 얼마나 발전했는지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라.”
어느 유명한 신학자가 한 말입니다. 꼭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마음에 담아두고 때때로 그 의미를 새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삼성전자 뉴스룸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업무 도중 난관에 부딪쳐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마다 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준 말이기도 하거든요.
언제부턴가 생긴 습관 ‘매일 아침 잠언집 읽기’
지난 1990년 삼성전자에 입사했으니 올해로 벌써 27년째가 되네요. 그 기간 동안 나름대로 꾸준히, 성실하게 일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매 순간 제 앞에 놓인 과제를 최대한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의미를 찾으려 애썼습니다. 설사 그게 뼈 아픈 실패였을 때조차 말이죠.
“지금껏 살면서 가장 도전적으로 느껴진(challenging) 경험이 뭐였나요?” 만약 누군가가 제게 묻는다면 제 대답은 아마 이럴 겁니다. “바로 지금이요.” 삼성전자에서 제 임무는 스마트폰 카메라에 들어가는 이미지센서를 연구하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기 광전’이란 신소재를 이용, 차세대 이미지센서를 개발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죠.
카메라 화질을 결정하는 픽셀(pixel)은 점차 작아지는 추세입니다. 그런데 픽셀이 지나치게 작아지면 피사체 현상(現像)에 필요한 최소한의 빛마저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면서도 최대 화질을 구현할 수 있는 픽셀 크기를 찾아내는 게 관건입니다. 삼성전자의 경우, 이 부문 기술력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말해 시중에 나와 있는 어떤 제품보다 최적화된 픽셀 크기를 구현하고 있죠.
하지만 삼성전자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색감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픽셀을 더 작게 쪼갤 순 없을까?’ 신소재를 활용, 새로운 이미지센서 개발을 실험하는 조직은 이 같은 질문에서 탄생했습니다.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기존 이미지센서에 유기 광전 소재를 접목해보자’는 목표를 갖고 말이죠.
실제로 유기 광전 소재는 무기물인 실리콘과 달리 빛을 투과해 적층(積層)이 가능합니다. 광전변환(光電變換, 빛의 변화를 전기 변화로 바꾸는 일) 특성이 있어 이미지센서로 사용하기에도 적합하죠. 물론 이 같은 아이디어가 실제로 제품화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전자 이동도나 열적 안정성 등 소재 자체의 성질과 관련해 해결돼야 할 문제도 있습니다. 양산(量産) 여부 가능성도 검토해봐야 하고요.
실패할 수 있다, 단 ‘같은 실패 두 번’은 없다
기업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내 연구 결과가 실제 제품 출시로 이어졌을 때’일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 제아무리 각광 받던 연구라 해도 그 기술을 적용한 제품이 양산에 실패했을 때 느끼는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과거 제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한창 연구하던 탄소나노튜브(Carbon Nano Tube, CNT) 관련 기술이 사업화를 눈앞에 둔 단계에서 양산 시도가 실패로 끝나는 바람에 관련 작업을 모두 접어야 했거든요. 돌아보면 그 일은 삼성전자에 입사한 이래 제가 겪은, 가장 큰 실패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탄소나노튜브는 여러 분야에서 많은 관심과 기대를 모으는 소재였습니다. 가벼우면서도 강도가 높아 자동차 프레임으로 사용될 수 있었죠. 특히 제가 관련 연구를 진행하던 시기엔 박형 TV나 LCD 백라이트 등 디스플레이 재료로 부쩍 주목 받았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제 과제는 실패했습니다. 양산에 부적격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료라 해도 시장에서 신뢰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면 제품화에 성공하기 힘들죠. 무던히 공 들였던 과제가 실패로 돌아가며 개인적으로 꽤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새로운 연구 과제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고 자리를 옮긴 팀에서 마주한 유기 광전 소재의 활용법에 대한 고민이 오래 이어졌습니다.
지금 연구 중인 ‘유기 광전 소재와 실리콘 이미지센서의 결합’ 아이디어는 그 과정에서 구체화됐습니다. 유∙무기 재료를 결합, 기존 무기재료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이 생각은 기술적 ‘궁합’을 맞추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재 특성과 양산성 두 요인을 모두 염두에 두고 연구를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같은 실패가 두 번 이어지게 할 순 없는 만큼 매 단계에서 검사와 조사를 철저히 하려 노력합니다(다행히 이번 연구는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해보자”는, 아주 단순한 긍정의 힘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 1874~1963)의 대표작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서 시 속 화자는 “똑같이 아름답지만 풀이 무성하고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곤 말하죠, 그 선택이 자신의 모든 걸 바꿔놓았다고요.
가끔 전 이 시를 떠올립니다. 제가 몇몇 동료와 걷고 있는 이 길 역시 이제껏 누구도 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아예 존재하지조차 않았던 길이라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새로운 재료를,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하려는 이 길 위에서 전 또 얼마간 좌절하고 뒤돌아보며 실패를 거듭하겠지요. 그건 비단 저뿐 아니라 세상 모든 연구원의 숙명 같은 것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전진과 후퇴를 무수히 반복하는 과정에서 문득 깨달은 이치가 있습니다. 너무 힘들어 전부 놓아버리고 싶을 때 “조금만 더 해보자”는 자기 다짐이, 그 아주 단순한 긍정이 모든 걸 변화시킨다는 사실 말이지요.
물론 제가 선택한 길을 남보다 좀 더 앞서 가려면 포기해야 할 게 많습니다. 문득 ‘가지 않았던 길’이 그립고 ‘다시 그 길을 찾아가볼까?’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적 드문 이 길의 끝엔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은 여전히 절 설레게 합니다. 그 설렘은 지금까지의 절 이끌어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삼성전자 마스터가 해야 할 일 가운데 연구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습니다. 후임 양성입니다. 창세기 12장 2절에 "You will be blessing(너는 복이 될지라)”이란 말이 있는데요. 전 늘 이 말을 마음속에 새기며 살고 있습니다. 고백하건대 전 후배들과 살갑게 지내는 선배도, 다른 이를 유머로 웃게 만드는 상사도 아닙니다. 그저 목표로 했던 과제를 효율적으로 달성해내기 위해 팀원들과 끊임없이 고민하는 리더일 뿐입니다.
부족한 게 많은데도 잘 따라와주는 팀원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그들의 장래에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상의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누군가와 대화가 나누고 싶을 땐 언제든 절 찾아주세요. 기쁜 마음으로 경청하겠습니다.
진용완 마스터는
대학에서 재료공학을 전공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90년 삼성전자에 입사, 줄곧 종합기술원에서 근무했다. 신소재 중 하나인 탄소나노튜브를 오랫동안 연구했고, 2016년 9월 현재 기술원 유기소재랩에서 스마트폰 카메라 이미지센서 개발에 쓰이는 소재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2009년 12월 마스터로 선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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