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지 만드는 데 스마트공장 구축이 왜 필요하냐고요?”
일명 ‘4차 산업혁명’ 열풍이 본격화하며 제품 생산 공정에 첨단 기술을 결합한 스마트공장이 새삼 주목 받고 있다. 하지만 기대만큼 우려가 큰 것도 사실이다. 생산과 유통, 고객 관리에 이르기까지 ‘기술’의 적용 범위가 너무 방대해 스마트공장을 ‘어디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결정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스마트공장’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비전문가는 막연하게 ‘공장 업그레이드’ 정도의 개념을 떠올린다. 하지만 스마트공장의 정의는 이보다 훨씬 정교하고 다층적이다<아래 박스 참조>. 삼성전자 뉴스룸은 시행 3년차에 접어든 삼성전자 스마트공장 프로젝트의 성과를 되돌아보고 보다 많은 기업에 스마트공장 구축 노하우를 전수하기 위해 우수 참여 기업 두 곳을 탐방하는 기획 기사를 마련했다. 첫 번째 주인공은 점보롤 제조 업체 아이리녹스(충남 천안시 동남구)다.
스마트공장
삼성전자와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정부(산업통상자원부∙경상북도)와 협업, 지방 기업의 제조 역량을 강화하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국내 중소·중견기업을 대상으로 2015년부터 추진해오고 있는 사업이다. △공장 운영 시스템 △제조 자동화 △공정 시뮬레이션 △초정밀 금형 등 4개 분야 중 지원 대상 업체가 가장 필요로 하는 부분에 대해 지원이 이뤄진다. 3년간 1000개사 지원을 목표로 진행 중이며 8월 1일 현재 완료 업체(643개)를 포함, 올해 말까지 1060여 개사 지원 달성이 예상된다
제조현장 혁신 활동
스마트공장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제조 현장으로서의 ‘기본’을 갖추는 활동이다. 스마트공장 지원 기업 중 대표이사가 희망하는 업체(8월 1일 현재 158개사)에 한해 삼성전자 전문 멘토 세 명이 짧게는 4주, 길게는 8주간 해당 기업에 상주하며 임직원에게 △공정 프로세스 개선 △생산성·품질 혁신 기법 전수 등 ‘삼성식(式) 제조 현장 노하우’를 전수한다
“싸고 질 좋은 화장지 만들겠다”며 14만 원으로 창업한 ‘열혈 20대’
아이리녹스는 엄정훈<위 사진> 대표가 2007년 14만 원의 자본금으로 세운 회사다. 이후 청소 용역 일을 하며 악착같이 자금을 보탰고, 나라에서 지원하는 연구∙개발(R&D) 자금으로 자체 살균 기술도 개발했다. 화장지는 이렇게 확보한 기술로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그의 눈에 띈 아이템이었다. “청소 일을 할 때부터 (화장지를) 눈 여겨보긴 했어요. 대기업과 경쟁하려면 우수한 품질의 제품을 값싸게 공급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겠더라고요. 그때부터 인도네시아로, 중국으로 엄청 뛰어다녔습니다. 다행히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도움으로 최고급 펄프를 합리적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죠.”
엄 대표가 품질만큼이나 신경 쓴 부분이 바로 디자인이었다. 고객에게 자사 제품의 완성도를 인정 받으려면 디자인 측면에서도 ‘최고’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그가 찾아간 이는 이집트 출신의 세계적 산업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Karim Rashid). “줄 수 있는 돈이 넉넉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일단 한 번 부딪쳐보기라도 하자, 싶었어요. 다행히 제 패기(?)를 높이 샀는지 라시드는 흔쾌히 저희와의 협업을 승낙했습니다. 그 덕에 제품 패키지와 점보롤 케이스, 회사 로고 디자인까지 전부 그에게 맡길 수 있었죠.”
엄정훈 대표의 노력은 오래지 않아 빛을 발했다. 우수한 원료와 세련된 디자인, 합리적 가격을 겸비한 아이리녹스 제품이 조금씩 시장에서 호평 받기 시작한 것. 자연스레 매출도 우상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매출 증대가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납품 규모가 크지 않을 때엔 별 문제 없이 돌아가던 제조 공정이 작업량 급증으로 한계에 부딪치기 시작한 것. ‘이대론 안 되겠다!’ 공정 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그의 눈앞에 삼성전자 스마트공장 지원 사업이 나타난 건 그 즈음이었다.
“스마트공장 도입, ‘생산성 향상과 원가 절감에 꼭 필요하겠다’ 확신”
“사실 처음 (스마트공장 모집) 공고문을 접했을 때만 해도 뭘 어떻게 바꿔준다는 건지 감이 잘 안 잡혔습니다. 일단 전화로 상담을 받았고, 그걸로도 모자라 삼성전자 관계자들을 직접 찾아가 이런저런 얘기까지 나눈 후 결심했죠. 뭣보다 당시 제가 고민하던 생산성 향상과 원가 절감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스마트공장 구축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단 확신이 섰습니다.”
모든 과정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건 아니다. 엄 대표를 가장 당혹스럽게 했던 건 직원들의 반대였다. “화장지 만드는 데 무슨 스마트공장이냐”는 주변의 냉소적 시선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당시 아이리녹스의 스마트공장 구축 실무를 담당했던 김동인(삼성전자 창조경제지원센터 스마트공장실행팀)씨 역시 엄 대표의 적극적 태도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스마트공장 프로그램 전수 기업을 정할 때엔 몇 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습니다. 스마트공장 도입 필요성이 높고 구축 후 기대효과가 큰지, 스마트공장 도입을 통한 목표 수준이 명확한지, 참여 임직원의 태도가 얼마나 능동적인지 등이 대표적이죠. 아이리녹스의 경우, 엄 대표의 동참 의지가 확고했습니다. 일단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자주 협업해야 해 서로 간 호흡을 잘 맞추는 게 중요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아이리녹스와는 궁합이 꽤 잘 맞는 편이었습니다.”
“매일 새벽 출근해 다 해진 작업복 입고 일하는 멘토들 열정에 탄복”
아이리녹스가 삼성전자의 ‘스마트공장 사업(제조자동화 부문) 대상 기업’에 선정된 건 지난해 2월. 이후 4개월간 ‘로봇팔(robot arm)’ 등 공장 자동화 설비 도입 작업이 진행됐다.
처음 삼성전자 측에서 제조현장 혁신 활동 동참을 권유 받았을 때 엄정훈 대표는 반신반의했다. “처음엔 하지 않으려 했어요. 대기업이 왜 이렇게까지 우릴 도와주려 하는지 선뜻 이해되지 않았거든요.” 우여곡절 끝에 아이리녹스 공장을 방문한 세 명의 멘토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저희 활동은 될성부른 기업이 제대로 된 스마트공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거든요. 그런데 처음 아이리녹스 공장을 찾았을 땐 솔직히 좀 막막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정리가 너무 안 돼 있었거든요.” (조상도 삼성전자 스마트공장실행팀 멘토)
엄 대표 입장에서 가장 곤혹스러웠던 건 4개월 내내 이어진 멘토들의 ‘새벽 출근’이었다. “집이 서울이라 사무실에서 잠을 청할 때가 종종 있거든요. 그런데 자문을 받기로 한 첫날 아침 7시 30분이면 예외 없이 멘토 분들이 공장 문을 두드리더군요. 야근 후 피곤해 좀 더 자고 싶을 때도 없지 않았는데 좀 당황스러웠죠. 세 분 모두 우리 직원들이 입는, 다 해진 작업복을 똑같이 입고 청소 같은 허드렛일부터 도와주셨습니다.”
사실 삼성전자 전문 멘토들의 이 같은 현장 혁신 활동은 이미 그 명성이 자자하다. 외부 인사의 느닷없는 방문에 현장 임직원이 느낄 수 있는 거부감의 벽을 낮추기 위해 멘토들은 함께 일할 기업이 정해지면 곧장 현장으로 향해 청소부터 도맡는다. 아이리녹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멘토들의 솔선수범이 마뜩잖았던 직원들은 어느새 멘토들의 방식을 좇아 현장 개선 활동에 하나둘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저 청소만 꼼꼼히 했을 뿐인데 직원들의 태도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 것. 멘토의 행동이 ‘단순 보여주기’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그들은 조금씩 맘을 열기 시작했다. 이는 곧 업무 태도 변화로 이어졌다. 아이리녹스의 제조 혁신 작업이 급물살을 타게 된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구체적 변화는 아래 박스 참조>.
김정국(삼성전자 스마트공장실행팀)씨는 아이리녹스가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을 ‘오너십’에서 찾았다. “멘토들이 이런저런 조언을 건네긴 하지만 결국 혁신에 관한 최종 결정은 대상 기업 대표가 내립니다. 회사가 얼마나 변하느냐 하는 것 역시 대표의 마음가짐에 달렸죠. 그런 점에서 엄정훈 대표의 적극적 태도는 자문 기간 내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임직원이 삼성전자 멘토 세 명에게 맘을 연 이후 아이리녹스 제조 현장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공구함을 정리하고 업무별로 공간을 구획하며 작업 동선을 보다 효율적으로 바꿨고, 고가 장비 구매 예산은 대체 재료를 마련하고 손수 설계하는 등의 방식으로 아꼈다. 대표적 예가 자재 운반에 쓰이는 소형 수레와 점보롤 케이스 작업대 등. 엄 대표는 멘토에게 조언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해결해야 할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기도 했다. 삼성전자 스마트공장실행팀 역시 글로벌기술센터 전문 엔지니어 파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엄 대표의 열정에 화답했다.
아이리녹스, 삼성전자 스마트공장을 만난 후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변화 하나_공간 활용의 마법, 창고로 다시 태어난 도크
올 들어 엄정훈 대표가 제일 고민했던 문제 중 하나는 공장 면적 확장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현재 면적으론 날로 늘어가는 생산량을 감당하기가 버거웠던 것. 당장 출고를 앞둔 제품을 원활하게 보관하려면 약 330㎡(100평)의 창고가 추가로 필요한 실정이었다. 1주일 넘게 삼성전자 멘토들과 머릴 맞대고 고민한 결과, “도크(dock)를 활용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화장지 재료인 펄프와 완제품이 드나들기 위한 차량 전용 공간이었던 도크는 한 달에 몇 차례 사용되는 게 고작이었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어 방치돼왔다. 멘토들의 제안을 들은 엄 대표는 클램프와 전동 윈치(winch, 밧줄이나 쇠사슬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내리는 기계)를 활용, 펄프 등을 배출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 결과, 아이리녹스는 도크가 있던 자리에 어엿한 창고를 마련할 수 있었다.
변화 둘_특별재난지역 포함되고도 하루 만에 작업 재개
아이리녹스 본사가 위치한 천안시는 지난달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됐을 만큼 수해 피해가 심각한 지역 중 하나였다. 실제로 당시 엄청나게 쏟아진 폭우로 토사가 무너져 내리고 배수로가 역류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공장 앞쪽 하천도 범람했다. 하지만 아이리녹스는 도크를 창고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하며 일찌감치 배수로를 점검했고 상부엔 대형 천막을 설치했다. 바닥에 그냥 뒀던 펄프와 완제품도 전량 팔레트(바퀴 없이 평탄하게 제작된 받침대) 위로 올려 보관하도록 미리 정비해뒀다. 이 같은 사전 대비 덕분에 아이리녹스는 폭우 이튿날부터 작업을 정상 속도로 재개할 수 있었다. 상당 기간 수해 복구 작업에 투자해야 했던 옆 공장들과는 대조적이었다.
변화 셋_작고 사소한 행동이 낳은 큰 변화, 넛지 효과?
인터뷰 직후 둘러본 공장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꽤 밝은 실내 조도였다. 엄정훈 대표는 그 비결을 얼마 전 일괄 교체한 LED 등으로 꼽았다. “공장이 어두우면 직원들의 시야가 좁아지죠. 설비에 부딪쳐 사고가 발생할 수 있고 장비에 문제가 생겨도 제때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청소 하나 신경 썼더니 확 달라지는 작업 환경을 보며 일종의 ‘넛지 효과[1]’를 체감했어요. 아무리 작고 사소하게 보이는 거라도 제때 변화를 주면 추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단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스마트공장, ‘한 단계 도약할 준비가 된’ 제조업체라면 꼭 도전해보길”
“삼성전자와 협업하며 가장 좋았던 건 업무 절차(process)를 제대로 익힐 수 있었던 점입니다.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이 아무리 물심양면으로 지원해도 저희 문제는 고스란히 저희가 해결해야 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문제 해결 방식을 스스로 발견하고 실천해갈 수 있는 힘을 선물해주신 것 같아 그 점이 가장 고맙습니다.”
엄정훈 대표가 처음 아이리녹스를 설립하며 세웠던 목표는 “점보롤 하나만큼은 우리나라 최고가 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스마트공장 프로그램 참여 경험을 바탕으로 혁신 작업을 꾸준히 계속해 세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위생 서비스 기업으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이리녹스로 인해 각자의 삶을 좀 더 청결하고 안전하게 영위할 수 있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인터뷰 말미, 엄 대표에게 “스마트공장 프로그램이 꼭 필요한 기업이 있다면 어떤 기업이겠느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의 대답은 이랬다. “어느 정도 기반은 닦았지만 한 단계 더 도약할 준비가 된 제조업체 대표라면 스마트공장, 특히 제조현장 혁신 활동을 꼭 한 번 경험해보라고 권하겠습니다. 새로운 걸 편견 없이 수용하려는 자세와 열정만 있다면 누구나 도전하실 수 있을 거예요.”
[1] nudge effect. 유연한 개입을 통해 선택을 유도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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