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적대는 것 사라진 일상,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2028년 어느 봄날,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소재 IT 기업에 다니는 A씨는 가슴이 설렌다. 2년간의 해외 파견 근무 종료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덕분이다. 회사 일은 어제 자로 마무리하고 오늘은 종일 자유 시간. 그는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줄 선물을 사러 가기로 했다.
쇼핑하고 비행기 탔다, 줄 한 번 안 서고!
미국에서 일하는 동안 가까워진 친구 B와 함께 인근에서 가장 큰 쇼핑센터에 도착했다. 입구에 도착한 두 사람이 각자의 스마트폰을 인식기에 갖다 대자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열렸다. A는 명품 브랜드 코너에서 아내를 위해 핸드백 한 개와 액세서리 한 세트를 샀다. 그런 다음, 무빙 벨트를 타고 아동 코너로 가 아이들에게 줄 장난감을 구입했다. 식료품 코너에서 초콜릿과 쿠키를 장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쇼핑이 끝났으니 이제 센터를 나설 차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모든 쇼핑 센터에 꼭 있었던 계산대는 찾아볼 수 없다. 줄 서서 기다리며 ‘더 짧은 줄 없나?’ 시선을 이리저리 돌릴 필요도, 하필이면 바로 앞에 선 대량 구매 고객 때문에 대기 시간이 길어져 짜증날 일도 없다. 맘에 드는 물건들로 가득 채워진 쇼핑백을 어깨에 둘러멘 A와 B. ‘쿨(cool)하게’ 출구 자동문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한다.
이튿날, 공항 가는 길에도 B가 동행했다. A의 소지품은 가벼운 선물 몇 개과 태블릿 PC, 스마트폰이 전부다. 한국에 가져갈 건 국제 택배로 다 부쳤고 몇 년 전만 해도 국경 통과 시 반드시 지참해야 했던 여권은 더 이상 필요 없다. 공항 주차장에 도착,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이 할 일은 입구 인식기에 스마트폰을 갖다 대는 것뿐이다.
게이트가 열리고 A와 B가 공항 건물로 들어선 시각은 비행기 탑승 완료 15분 전. 내부 풍경은 몇 년 새 사뭇 달라졌다. 길게 늘어선 체크인 대기 행렬, 늘 북적대는 검색대와 출국 심사 부스 같은 건 더 이상 볼 수 없다. 푹신한 소파가 놓이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공간은 흡사 편안한 라운지 같다. B와 석별의 정을 나눈 A는 짐을 챙겨 탑승 게이트를 통과해 비행기에 오른다. 느긋하게 자리를 잡고 몇 분이 흘렀을까, 스튜어디스가 이륙 안내 방송을 시작한다.
무인상점, 외관은 매끈한 유선형… 이면은?
위 A씨 사례 속 시간적 배경은 10년 후. 지금과의 차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신분(혹은 신용) 입증 절차의 실종’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뭘 샀는지, 구매 대금 지불 능력이 있는지, 돈도 안 내고 가져가는 물건은 없는지 점검하는 절차 일체가 사라진 것이다. 누가 됐든 자신의 지불 능력 한도 내에서 원하는 물품을 갖고 나가면 나머지 절차는 전부 알아서 해결된다. 그뿐 아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한 나라를 떠나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가도 괜찮은 건지, 정당한 값을 치르고 티켓을 구매했는지, 위험한 물건을 소지하고 있진 않은지 검사하는 과정도 가뿐하게 생략된다.
이 같은 변화는 꽤 혁신적이다. 오늘날 당신 자신의 일상을 떠올려보라. 대형 마트나 공항, 병원과 공연장, 주차장 등 어디서든 줄 서는 행위는 ‘기본’이다. 성가시고 짜증나긴 하지만 꼭 필요하고 또 중요한 절차란 인식이 있기 때문에 대다수는 불평 없이 그 시간을 감내한다. 하지만 2028년 A씨의 일상에서 그런 번거로움은 완전히 해소돼있다. 말하자면 삶의 전 과정이 매끈한 유선형으로(streamlining) 흘러갈 거란 상상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상상이기만 한 건 아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올 초 아마존이 문을 연 무인상점 ‘아마존고(Amazon Go)’다. (실제로 아마존고는 A씨가 쇼핑센터에서 가족에게 줄 선물을 사며 경험한 자율 쇼핑을, 간단하면서도 초보적인 규모로 구현한 형태다.)
이런 ‘스트림라인 일상’의 이면에선 첨단 기술이 복합적으로, 촘촘히 구동된다. 이를테면 A씨가 자율 쇼핑을 즐겼던 쇼핑 센터로 장면을 되돌려보자.
특정 물건을 그냥 집어 갖고 나가기만 해도 그게 뭔지 알아서 계산해내려면 언뜻 △고객의 움직임을 인식, 다각도로 찍는 카메라(하드웨어) △촬영된 이미지 속 고객이 어떤 사람이며 고객이 집어 든 물건의 정체는 뭔지 찾아내는 데이터 분석 기법(소프트웨어) 같은 기술이 필요할 터. 아마존고 운영을 가능케 하는 기술도 △컴퓨터 비전 △딥러닝 △센서 퓨전 등 이와 비슷하다.
사람∙센서∙데이터∙기기, ‘이벤트’로 연동되다
컴퓨터 비전과 딥러닝, 그리고 센서 퓨전. 사실 이 셋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연관돼있을 뿐 아니라 다른 이름도 여럿 갖고 있다. 우선 컴퓨터 비전은 안면인식[1]∙영상인식[2] 등을 포괄하는 용어다. ‘컴퓨터 데이터 처리를 한층 심화시킨 기술’ 정도로 해석되는 딥러닝 역시 실생활에선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 등의 기술과 거의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엮여있다[3]. 끝으로 센서 퓨전은 ‘다양한 다수 센서로 파악하고 분석한 데이터를 종합, 보다 정확한 최종 데이터를 얻어내려는 기술’을 일컫는다. 이 정의에 따르면 컴퓨터를 구동시켜 가능케 하는 인식 기술 대부분은 센서 퓨전 방식을 취하고 있다.
세 기술의 성격을 아우르는 키워드가 바로 이벤트-드리븐(event-driven), 즉 ‘변화를 감지한 센서가 그에 반응해 다른 메커니즘이 구동되는’ 방식이다. 이번엔 A씨의 쇼핑 과정을 ‘이벤트-드리븐적(的) 관점’에서 들여다보자. A씨가 쇼핑센터 입구 앞쪽 인식 장치에 스마트폰을 갖다 대는 순간, 인식 장치는 스마트폰에 탑재된 자율 쇼핑 애플리케이션(이하 ‘앱’)을 인식한 후 “이 사람은 여기서 쇼핑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한다. 이전 회차에서 언급됐듯 이벤트-드리븐에서 ‘이벤트’는 ‘특정 의미를 띠고 일어나는 일’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에 따라 이벤트(변화)가 발생하면 해당 데이터는 인식 장치에 연결된 기기로 일파만파 전송된다.
쇼핑센터 천정에 달린 카메라 한 대가 A씨를 추적하는 것 역시 그 일환이다. 추적 카메라 입장에서 A씨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이벤트다. 바닥에 설치된 무게 센서 입장에서도 A씨의 발걸음은 하나하나가 전부 이벤트로 작동한다. 천정 카메라와 바닥 무게 센서가 기록한 데이터는 ‘센터’로 보내져 A씨의 신원 확인에 활용된다. 이 과정에서 수집된 체중∙외형 데이터에 (쇼핑센터 입장 당시 인식시킨) 스마트폰 앱 속 신상 정보가 합쳐지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달라질 순 있지만 은행 잔고나 신용도도 얼마든지 확인 가능하다.
A씨가 진열대에서 아내가 좋아할 만한 핸드백을 발견하고 집어 드는 동작 역시 이벤트다. 이때 A씨를 추적하던 카메라에서 ‘핸드백 집어 드는’ 움직임(motion)을 감지한 영상인식 정보와 핸드백 무게만큼 가벼워진 진열대 정보가 합쳐져 ‘물건이 선택됐다’는 판단에 이르면 이번엔 그 판단 자체가 하나의 이벤트로 작용한다. 그 이벤트에 반응한 데이터 센터의 지시에 따라 A씨가 집어 든 핸드백 주변 카메라들은 A씨의 손과 거기 들린 핸드백을 다각도에서 연속적으로 촬영, 데이터 센터로 보낸다.
데이터 센터는 이렇게 취합된 정보를 기반으로 영상인식 과정을 거쳐 선택된 물건을 점검한다. 여기에 진열대에서 전송된 무게 감소 정보를 더하면 제품 특정 완료. 그 정보는 다시 이벤트가 돼 컴퓨터가 핸드백 값을 확인, 계산을 마치면 해당 정보가 데이터 센터로 전송된다. 거기선 또 은행 데이터 센터와 연결돼 ‘A가 그 상품을 살 만한 잔고나 신용이 있는지’ 확인한다. 은행과의 계산이 완료되면 “모든 확인 절차가 끝났다”는 정보가 또 다시 이벤트로 작용, A씨의 스마트폰 앱에 메시지로 보내진다. 물론 여기엔 그가 고른 핸드백 사진과 가격, 지불 정보까지 포함된다.
이처럼 계산 과정이 생략돼 평온하기 그지없는 자율 쇼핑, 그 이면엔 치열한 기술의 물밑 작업이 숨겨져 있다. 사람(사물)과 센서 간, 센서와 데이터 센터 간, 그리고 데이터 센터와 기기 간 관계는 저마다 이벤트-드리븐적으로 연동돼 치열하고 정교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이 모든 관계에서 신호를 보내거나 정보를 주고받는 알고리즘을 만드는 작업이 바로 ‘이벤트-드리븐 프로그래밍’이다.
고정된 체계 거부하는 사회 변화와 ‘닮은꼴’
‘아마존고 같은 무인상점, 혹은 위 가상 사례 속 A씨가 경험한 자율쇼핑 메커니즘이 보편적으로 실현될 날이 올까? 너무 많은 첨단 기술이 집약돼야 하는 만큼 대중적으로 보급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자칫 안전성 논란 등에 발목이 잡혀 기술 전체의 발전에 제동이 걸리면 어쩌지?’ 이벤트-드리븐 시스템의 개념을 어렴풋이라도 이해한 이라면 누구나 떠올려봄 직한 질문이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확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분명한 사실은 세상이 끊임없이 변해왔단 것, 그리고 오늘날 일상화된 기술 대부분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돈이 너무 들어 상용화는 요원하다”는 평가를 받았단 것이다.
미래 소비자 성향도 고려해야 할 변수다. 고작 통조림 하나 사기 위해 자신의 얼굴은 물론, 신상 일체를 공개해야 하는 식품점. 과연 모두에게 환영 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와 관련, 흥미로운 해석도 나온다. 이를테면 톰 카포라소(Tom Caporaso) 클라러스커머스[4] 최고경영자(CEO)의 견해처럼 말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전반적으로 신원 노출 문제를 그리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보다 자신들의 일상을 바꿔줄 수 있는 신기술에 훨씬 열광하는 편이죠.”
어찌 보면 이벤트 드리븐 프로그래밍에 기반을 둔 기술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추세는, 고정적이고 경직된 체계가 점차 무너지는 문화 전반의 흐름과 부합하는지도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시스템을 미리 짜둔 후 교육과 광고를 통해 사람들을 그에 맞춰가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반면, ‘뭔가 일(event)이 생기면 그에 따라 원활하게 구동되는(driven)’ 전략의 효용성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일상에서도 마케팅에서도.
[1] 2016년 3월 23일자 스페셜 리포트 “‘인공지능의 미래가 두렵다’는 당신에게” 참조
[2] 2017년 10월 25일자 스페셜 리포트 “인식∙화질∙압축… 첨단 인공지능, 삼성전자 제품 탑재 준비 완료!” 참조
[3] 2016년 7월 20일자 스페셜 리포트 “무섭게 진화하는 기계, 그 종착역은?” 등 참조
[4] Clarus Commerce. 미국 코네티컷주(州) 기반 소매업 지원 프로그래밍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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