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적 기능주의’ 빌트인 가전이 뜬다
공간의 배치와 장식은 권력을 반영한다. 특정 건물(혹은 장소)에서 제일 눈에 띄고 공들여 꾸며지는 공간은 지위 높은 사람들이 모이거나 가장 중시되는 곳이다. 그에 반해 권력 없는(적은) 집단이 쓰는 공간은 설사 기능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더라도 비교적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별다른 꾸밈없는 형태로 존재하게 마련이다.
주방의 환골탈태… ‘주변부’서 ‘중심부’로
전통 한옥에서 권력 상층부 공간은 이를테면 사랑채다. 집안 어른이 거주하며 사람들을 만나는, 유교적 가부장 사회를 대표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부터 사랑채는 하늘로 치솟는 듯한 팔작(八作) 기와지붕은 물론, 큰 재목을 깎아 기둥을 받친 누각까지 그 집안의 격조에 맞춰 최대한 멋지게 지어졌다.
반면, 가사노동은 한 집안을 유지해가는 실질적 활동인데도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공간에서 이뤄지곤 했다. 건물 제일 가장자리에, 문도 제대로 달리지 않은 채 자리 잡은 부엌. 거기서 뒤뜰로 이어지는 살림 공간을 떠올려보자. 이곳에선 아낙네들이 반짝반짝 닦고 공 들인 장독, 어쩌다 한구석에서 자연스레 자란 분꽃과 맨드라미 정도가 정겨움을 더했다. 하지만 ‘격조’니 ‘심미’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같은 풍경은 다른 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사노동 공간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건 20세기 초입,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면서부터다. 실제 이 무렵부터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고 가사노동에서 면제되는 여성 수가 급증했다. 가정에 남아 가사노동을 계속해야 하는 여성을 위한 배려도 다양한 방법으로 이뤄졌다. 이 시기에 선보인 가전제품은 여성이 가사노동에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를 확 줄여줬다. 가사노동 공간의 인테리어에 공을 들이는 풍조 역시 이 시기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파트가 대거 보급되며 주방과 세탁실 등 가사노동 공간이 거실 공간과 연결됐고, ‘예쁜 주방’을 선호하는 경향은 더 뚜렷해졌다.
21세기로 접어들며 주방을 비롯한 가사 공간의 격(格)은 한층 올라갔다. 특히 외식 산업이 발달하고 레토르트 식품 등 반(半)조리 상태 상품에 대한 의존도가 커진 데다 ‘집밥’ 등 좋은 음식에 대한 사람들의 향수까지 더해져 가정 내에서 주방의 위상은 날로 높아지는 추세다. 이와 함께 ‘아름다우면서도 높은 수준의 기능을 갖춘’ 주방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도 커지고 있다.
비움의 미학… 주방도 ‘미니멀리즘’ 열풍
오늘날 주방에서 가장 선호되는 디자인 철학은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다. 흔히 미술 작품에서 ‘미니멀리즘’이라고 하면 장식적 요소를 배제하고 선(線)·형(形)·색(色)의 사용을 극도로 절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실제로 요즘 소비자들은 갖가지 물건이 꽉 들어찬 주방보다 여백미를 살린 공간에 한두 가지 소품으로 ‘포인트’를 준 주방 인테리어를 훨씬 선호한다.
독일계 헝가리인인 예술사회학자 아르놀트 하우저(Arnold hauser, 1892~1978)는 자신의 책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근대 초기 유럽 실내 꾸밈에 반영된 신흥 부유계층의 심리를 지적한 적이 있다. △화려하고 중후한 가구 △세계 각국에서 온 희귀 장식품(청나라 도자기, 타이 비단, 아프리카 목각 등) △한쪽 벽면을 꽉 채우는 책장 따위가 모두 한 공간에 놓이는 인테리어의 기초엔 ‘해외 식민지 경영으로 얻게 된 경제적 여유와 자신의 박식함을 자랑하려는 심리’가 깔려있단 게 당시 그의 주장이었다.
미니멀리즘적 실내 공간을 선호하는 21세기 소비자의 심리는 어떻게 해설할 수 있을까? 이때 미니멀리즘이란 ‘표면적 심미 요소보다 성숙한 내면적 에너지를 작품 형태로 내보일 줄 아는 관록의 표현’과 같은 의미다. 오늘날 소비자가 단순한 주방을 선호하는 건 그만큼 예술적 감각이 성숙해졌단 뜻이기도 하지만 좀 더 실용적인 이유도 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개념 중 하나가 바로 동양의 풍수(風水) 사상이다. 풍수 사상은 20세기 말부터 서구 선진국 일부에서 적극적으로 도입, ‘풍수 인테리어(Feng Sui interior)’란 개념으로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풍수 인테리어의 기본 중 하나는 ‘덩치 큰 가구가 공간을 점유하는 일이 없도록 공간을 적절히 비워두는 것’이다. 그래야 공간 속에서 에너지가 원활히 순환돼 쾌적한 환경이 완성되고 사용자의 건강 유지에도 유용하단 논리다. 미니멀리즘의 ‘신(新)과학’이다.
▲삼성 빌트인 가전을 설치해 ‘미니멀리즘 디자인’을 구현한 주방
주방은 이제 더 이상 하인들이나 드나드는 저급한 장소도,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여성의 전용 공간도 아니다. 가족 구성원 전체의 관심과 애정이 집중되는 공간인 동시에 온 가족이 서로에게 필요한 일을, 기분 좋게, 효율적으로 나눠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런 공간이 점차 ‘미니멀리즘’ 경향으로 나아간다는 건 곧 ‘(음식 장만을 비롯한) 가사노동이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지켜주는 핵심 기초’란 사실을 21세기 소비자가 충분히 인식하고 있단 사실을 보여준다.
가사노동 공간에서 미니멀리즘 인테리어를 구현하려면 빌트인(built-in) 가전제품의 존재는 필수다. 빌트인이란 실내를 꾸밀 때 벽면에 가구를 짜면서 가전제품이나 기타 기구를 그 안에 집어넣어 돌출해 보이지 않도록 하는 형태를 일컫는다. 실제로 냉장고나 오븐레인지, 세탁기 등 덩치 큰 가전제품이 주방 공간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으면 보기에도 부담스러울뿐더러 원활한 작업 공정도 해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빌트인 가전제품은 선진국을 중심으로 이미 1960년대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최근 지어지는 주거용 주택에서도 빌트인 가전 비율은 계속 높아지는 추세다.
북미·유럽 시장점유율 15%, 40% 돌파
냉장고·세탁기·건조기·오븐레인지·쿡탑·레인지후드·전자레인지·식기세척기…. 오늘날 주로 생산되는 빌트인 가전 품목이다. 빌트인 가전은 기존 프리스탠딩(free-standing) 제품보다 면적은 덜 차지하면서도 기능은 엇비슷하게 수행해야 해 그만큼 높은 수준의 생산 기술이 요구된다. 그에 따라 생산 단가도 올라가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빌트인 가전 시장 규모는 이 같은 부담에도 아랑곳없이 빠른 속도로 확대되는 추세다. 이를테면 지난해 북미 지역 가전 시장 총 규모는 280억 달러(약 31조5000억 원)이었는데 그중 빌트인 가전 시장 규모는 42억 달러(약 4조7000억 원)로 약 15%였다. 건축(인테리어)업자 사이 유통분만 따지면 그 비중은 34%까지 치솟았다[1]. 총 시장 규모가 438억 달러(약 49조2000억 원)인 유럽 지역 내 빌트인 가전 비중은 그보다 훨씬 높은 41%(181억 달러, 약 20조3000억 원) 선이었다. 주방 전문 업체 간(B2B) 유통 가운데 빌트인 비중은 90%에 이르렀다[2].
국내 가전 시장에서 빌트인 수요 증가세도 만만치 않다. 역시 지난해 6조 원 수준이었던 전체 시장에서 빌트인 가전 규모는 7900억 원 수준이었다. 전체 시장 대비 점유율로 따지면 13%에 불과하지만 B2B 유통 측면에서 집계하면 수치가 80%까지 올라간다[3]. 최근 새롭게 지어지는 건물에선 빌트인 가전제품이 단연 대세란 뜻이다. 그간 빌트인 가전 수요는 주로 건설사 간 거래에서 발생해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엔 개별 가정의 인테리어 리모델링 작업에서도 빌트인 가전의 인기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빌트인 가전을 장만할 수 있는 공간의 종류와 수로 날로 느는 추세다.
이 같은 빌트인 가전 분야에서 삼성전자의 행보는 심상찮다. ‘좋은 디자인은 사용자의 눈만 즐겁게 하는 게 아니라 사용자의 생활 자체를 바꿔준다’는 제품 철학 아래 어떤 주방 인테리어에도 품격 있게 조화되는 빌트인 제품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최근 주부들 사이에서 단연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고 있는 전기레인지는 실내 공기 오염 우려와 화재 발생 위험 등 가스레인지가 지닌 여러 단점을 차례로 해소하며 ‘기술 개발과 디자인이 심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빌트인 가전, 첨단 기술∙디자인의 ‘정수’
은은한 광택이 아름다운, 흰 벽면. 그걸 터치하면 냉장고와 푸드 프로세서, 오븐레인지가 등장한다. 아, 식기세척기도 물론 내장돼 있다. 원하는 온도의 물이나 얼음을 공급해주는 정수 장치도 벽면을 터치하면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식탁 위에 설치된 쿡탑을 이용하면 음식 데우기 정도 작업도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 조리도, 식사도 하지 않을 땐 주방 수납장 한쪽 끝에 설치된 빌트인 세탁기∙건조기 세트로 쾌적하게 의복을 관리할 수 있다. 이처럼 빌트인은 철저히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사용자의 수요를 삼키며 손에 잡힐 듯한 현실로 다가왔다.
디자인은 기술을, 당대 사회상을, 그리고 그에 따라 변화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21세기가 성숙기를 향해 나아가는 요즘, 이 모든 건 결국 ‘여백의 미를 통한 더 나은 삶의 추구’로 불리는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다. 그리고 빌트인 가전은 그 끝 어디쯤엔가 자리 잡고 있다, 그걸 가능케 해온 기술과 디자인 개발진의 자부심을 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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