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 과학도, 동의보감 속 ‘흙물’의 가능성에 주목하다
삼성전자는 “과학기술 분야 우수 인력을 발굴, 육성해 세계 최고 경쟁력과 기술력을 확보한다”는 취지로 지난 1994년부터 휴먼테크논문대상을 시행해오고 있습니다. 어느새 23회째를 맞은 올해 시상식에서도 실용적이고 우수한 아이디어가 쏟아졌는데요.
올해 휴먼테크논문대상 수상자엔 조선시대 의서(醫書) ‘동의보감’에서 힌트를 얻어 오늘날 현실에 맞게 연구한 고교생이 포함돼 있습니다. 고교 부문에서 금상을 받은 정상현(서울 진선여고 2년)양이 그 주인공입니다. ‘옛것을 익히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새것을 안다’는 뜻의 사자성어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몸소 실천한 정양을 시상식 직후 만났습니다.
“중학교 실험 시간에 확인한 황토의 효험, 친환경 항균제에 응용하고 싶었죠”
▲상현양이 이번에 제출한 논문 주제는 ‘황토 지장수의 나노 입자’였습니다
정상현양이 올해 휴먼테크논문대상에 제출한 논문엔 특이한 물이 하나 나옵니다. 지장수(地奬水)란 명칭을 지닌 이 물은 쉽게 말해 ‘흙물’입니다. 황토 속으로 구덩이를 판 곳에 물을 부은 후 휘저어 굵은 입자를 가라앉히면 떠오르는, 맑은 물을 가리키죠. 동의보감이 “효능 좋은 물”이라고 직접 언급했을 정도로 세균 억제 능력이 뛰어난 걸로 알려져 있지만 상현양이 논문을 발표하기 전까지만 해도 지장수의 어떤 물질이 항균 작용에 관여하는지에 관해선 알려진 내용이 별로 없었습니다.
[정상현양의 논문은 이런 내용]
정상현양의 논문명은 ‘나노 입자만을 포함한 황토 지장수의 생물학적 활용 방안에 대하여‘입니다. 그는 “인체에 무해한 친환경 항균제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운 후 연구에 필요한 황토를 채취하기 위해 △충남 보령 △전북 고창 △전남(영암∙나주) △경남 하동 △경북 경주 △부산 기장 등 전국 곳곳을 누볐습니다. 이후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지장수에서 항균 물질을 성공적으로 분리, ‘0.2㎛ 이하 양전하 나노 입자 지장수가 친환경 항균 능력을 지닌 유효 성분’이란 사실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죠.
상현양이 발견한 이 물질은 (아직 정확한 규명 작업이 끝난 건 아니지만) 기존 화학 물질로 제조된 항균 물질과 달리 옷감과 종이에 부착해도 항균 효과가 보존되는 걸로 확인됐습니다. 또한 세척이나 자외선 노출, 3차 증류수와의 혼합 사용 등 다양한 변수에서도 그 효과가 유지됐죠. 기존 화학적 유해 항균 물질보다 안전하면서도 유용하게 쓰일 여지가 충분하단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셈입니다.
▲휴먼테크논문대상은 국내외 과학계 인사들과 젊은 과학도가 주목하는 대표적 행사입니다
언뜻 생각해도 쉽지 않은 연구 주제를, 그것도 고교생이 어떻게 떠올릴 수 있었을까요? “중학생 때 우연히 녹조 제거 연구를 진행하며 황토를 처음 접했어요. 그때 실험을 통해 ‘황토가 세균 억제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죠. 원래 화학과 생물에 관심이 많아 계속 맘에 두고 있었는데, 최근 유해 화학 물질로 인한 피해 사례가 계속 뉴스에 오르내리는 걸 보고 문득 ‘황토를 이용해 친환경적이고 인체에 무해한 실용적 항균제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실험은 무참히 ‘실패’로 끝났습니다. 황토를 그대로 식물에 뿌렸으니 좋은 결과가 나올 리 만무했죠. 하지만 상현양은 포기하는 대신 지장수를 대안으로 떠올렸습니다. “언젠가 ‘지장수 속 나노 입자가 녹조 세균의 세포막에 침투해 세균을 죽인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났어요. ‘(황토가 아닌) 지장수 속 물질을 분리해내야겠다!’ 싶었죠.”
관심사를 ‘황토’에서 ‘지장수’로 돌리자, 작업은 술술 풀렸습니다. 다만 지장수로 진행한 실험에서도 지장수를 그대로 투여하면 토양 박테리아가 식물 생장과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맘에 걸렸죠.
'온전한 지장수론 항균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 상현양은 이후 지장수에서 (항균제 역할을 하는) 유효 물질만 분리하기 위한 시도에 나섰습니다. 0.2㎛ 필터를 활용, 나노 입자만 포함시킨 지장수를 추출해 실험한 건 그 맥락에서였습니다. 그 결과, 식물 생장이 촉진되고 호기성 토양 박테리아가 회복되며 분리된 물질의 항균성은 어느 정도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혐기성 토양 박테리아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습니다.
▲“지장수에서 항균 물질을 분리해내는 게 가장 힘들었다”는 상현양은 실험 당시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습니다
또 다시 난관에 부딪친 상현양이 이번에 떠올린 건 ‘전기분해’였습니다. 그는 전기분해 장치를 활용, 지장수를 양(+)전하 나노 입자와 음(-)전하 나노입자로 분리해 다시 실험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암 지역에서 채취한 지장수를 제외한 나머지 양전하 나노 입자 지장수에서 혐기성 박테리아가 회복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죠. 나노 입자 지장수가 화학물질로 만들어진 항균 제품보다 안전할 수 있단 사실이 입증된 순간이었습니다.
일반고 출신으로 과학고 또래들과 경쟁해 수상… “연구 이어갈 자신감 얻어”
▲정상현양은 올해 휴먼테크논문대상 고교 부문 생물 분야에서 금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상현양은 일반고에 재학 중입니다. 실험 환경이 잘 갖춰진 과학고 학생들에 비해 여러모로 열악한 여건에서 연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죠. 실제로 학교에서 실험을 진행하는 일이 여의치 않았던 그는 시간을 쪼개어 외부 실험실을 오가며 학업과 실험을 병행했습니다. “솔직히 처음 연구를 시작할 땐 주변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어요. 일반계 고교생이 이런 연구를 진행하는 게 가능하겠느냐, 는 편견도 있었고요.”
고전하던 상현양의 지원군은 고 1 때부터 그와 함께해온 김선정 서울 진선여고 교사(생물)였습니다. 고교 입학 직후 사제지간으로 처음 인연을 맺은 둘은 상현양이 생물에 관심을 보이고 관련 연구를 시작하면서 둘도 없는 멘토∙멘티 사이가 됐습니다. 상현양에게 휴먼테크논문대상의 존재를 알려준 것도 김 교사였죠. 김 교사의 동기 부여와 격려 덕분에 상현양의 연구는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수상 직후 다른 수상자들과 나란히 연단에 올라 포즈를 취한 정상현양(사진 왼쪽에서 첫 번째)
다음 달이면 고 3이 되는 상현양의 목표는 뚜렷합니다. “대학에 진학한 후 이번 연구에서 분리해낸 나노 입자를 주사전자현미경으로 관찰, 구체적 성격을 명확히 규명하고 싶습니다. 이번 제 논문에선 지장수 유효 입자를 크기별로 분리하는 데 성공했을 뿐 정확한 성격까지 알아낸 건 아니거든요. 분석 작업을 계속해 구체적으로 어떤 성분이고 실용화 방안은 뭔지 더 알아볼 생각이에요.”
▲“대학에서도 이번 논문 연구를 계속 발전시켜 진전된 성과를 거두고 싶다”는 정상현양
사실 올해 휴먼테크논문대상의 심사 기준엔 ‘실용성’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상현양이 논문 주제를 구체화할 때 도움 받은 건 바로 이 지점이었는데요. “인체에 무해한 항균제를 만들면 실생활에서의 활용도가 높아지니 관련 연구를 진전시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덕분에 연구 초기 다소 모호했던 방향을 뚜렷이 정할 수 있었죠.” 아울러 그는 “연구 여건이 나보다 훨씬 좋은 과학고 학생들과 경쟁해 금상을 받았단 사실만으로도 너무 큰 자신감을 얻었다”며 휴먼테크논문대상 주최 측에 고마워하기도 했습니다.
“상에 집착하지 마세요… 진짜 좋아하는 연구 시작하면 상은 따라오니까요”
휴먼테크논문대상에 도전하려는 또래나 후배에게 정상현양은 어떤 조언을 건넸을까요? “‘어떻게 하면 상 받을 수 있을까?’란 생각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그보다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분야를 깊이 탐구하고 주변에서 실질적 조언을 받으며 연구를 진행하시길 권합니다. 그 편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으니까요.”
▲시상식이 있던 날, 상현양은 ‘휴먼테크논문대상 역대 두 번째 대상 수상자’로 화제를 모은 권민우씨와 기념 촬영을 하기도 했습니다
‘스스로 진짜 관심을 두고 열정을 다한 연구여야 결과도 좋을 수 있다’는 말, 과연 고개가 끄덕여지시죠? 앞으로도 휴먼테크논문대상을 통해 동기 부여와 연구 의지를 얻어가는 청(소)년 과학도가 좀 더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정상현양이 그랬듯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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