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그 오묘하고도 신비한 세계
기억은 인출 과정의 의식 여부에 따라 ‘암묵기억’과 ‘사실기억’으로 나뉜다. 전자는 인출 과정이 의식되지 않는, 운동 절차와 관련된 기억이며 후자는 인출 과정이 의식되고 언어로도 표현 가능한 기억이다.
사실기억은 다시 ‘사건기억’과 ‘의미기억’으로 구분된다. 사건기억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에 대한 기억이다. 자연히 시간·장소 정보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사건기억의 또 다른 명칭은 ‘일화기억’이다. 종종 이야기의 주된 재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건에 대한 기억은 해마에서 ‘자동으로 즉시’ 이뤄진다. 색다른 이야기는 잊히지 않는다. 사건(일화)기억은 해마에 임시로 저장됐다 대뇌피질로 이동, 장기기억으로 바뀐다.
대뇌피질에서 새로운 경험이 사건기억으로 축적되면 이중 공통점을 지닌 것들이 점차 의미기억으로 전환된다. 시간이 흐르며 사건기억의 꼬리표였던 시·공간 정보가 사라지는 대신 기억 속 경험의 공통점이 지각되며 의미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모든 의미기억의 출발점은 사건기억이다.
의미기억이 사건기억의 공통점을 범주화하며 서서히 생겨나는 거라면 사건기억이 생성되는 해마가 손상된 경우, 새로운 의미기억의 학습이 가능할까? 이와 관련, 꽤 유명한 피험자가 한 명 있다. ‘H.M’이란 약자로 더 유명한 헨리 몰래슨(Henry Molaison, 1926~2008)이 그 주인공이다.
몰래슨의 사례가 흥미로운 건 ‘해마 없이 대뇌피질에서 의미기억이 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미미하게나마 밝혀졌기 때문이다. 어릴 적 사고로 뇌전증(간질)을 앓았던 그는 27세 때이던 1953년 수술로 편도체·해마 등 뇌 일부를 제거했다. 뇌전증은 나았지만 이번엔 기억 능력에 문제가 생겼다. 해마가 없어 사건기억이 생성되지 않았고, 새로운 경험의 축적이 뒷받침돼야 하는 의미기억 생성 능력 역시 눈에 띄게 약해진 것. 일화기억이 없다 보니 그의 일상 대부분은 수술 이전 형성된 의미기억의 영향권 아래 놓였다. 스물일곱 살 이후 수 십 년간의 세상 변화는 거의 인지하지 못했다. 그에게 현재는 (수술로 해마를 제거한) 1953년에 고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은 시간의식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기억으로 끊임없이 편입되는 경험 덕분에 현재는 과거가, 미래는 현재가 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며 ‘과거-현재-미래’의 화살은 시간의식을 출현시킨다. 하지만 몰래슨처럼 현재 경험이 해마에 의해 기억으로 고정, 과거화되지 않으면 시간의 화살은 그 상태로 정지된다. 현재가 흘러가지 않고 영원히 고정되면 미래 역시 사라진다. 실제로 몰래슨은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수술 전 형성된 자신의 의미기억을 바탕으로 82세까지 살았다.
개나 고양이도 사건기억 생성 능력이 약하다. 따라서 이들 동물은 기억을 바탕으로 행동을 선택하기보다 감각 입력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간다. 꿈 속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사건(일화)기억 반영이 쉽지 않아 주변 환경 입력에 반응, 반사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처럼 그려지는 것. 반면, 인간의 자아는 과거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인출하며 형성되는 자전적 기억으로 구성된다. 현재의 사건기억이 해마의 작용으로 ‘지속적 과거’를 만들지 못하면 인간 내면의 시계는 멈추고 자아도 약화된다. 즉 과거와 현재, 미래는 기억에 의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기억이 정지되면 세 요소는 금세 (현재라는) 한 점으로 응집된다.
이렇게 볼 때 현재는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과거의 마지막 신호(pointer)인 동시에 시·공간의 울타리에서 생성되는 인간의 행동 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궤적이 정지하면 과거는 더 이상 자라지 않은 채 현재 시점에 고정된다. 미래 역시 기약이 없다. 현재를 기억해야 과거(‘기억된 현재’)와 미래(‘잠시 후 현재’)도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려 노력하는 존재다. 다가올 앞날에 대한 걱정이 인간 지능 발달의 원동력인 셈이다. 실제로 미래란 개념 자체가 없었던 몰래슨은 ‘내일’을 걱정하지 않았다. 시간의식을 느끼면서부터 인간은 영원히 지속되는 시간 흐름을 견디기 위해 시간을 반복되는 단위로 개념화했다. 즉 ‘무한 직선’의 시간을 (반복 가능한) ‘원’의 형태로 바꿔 인식하면서 반복되는 시간 주기에 자신들의 생활 유형을 결합시켰다. 계절마다 반복되는 ‘축제의 날’을 설정, ‘유한한 삶 속에서 무한히 지속되는 시간’이란 (감당하기 힘든) 느낌을 조절했다. 무한히 펼쳐진 공간에 대한 막막함도 동서남북 같은 좌표 설정으로 극복하려 애썼다.
꿈과 동물, 그리고 기억상실증 환자는 어쩌면 영원한 현재적 존재인지도 모른다. 반면, 과거 기억을 반영한 현재 입력 처리 과정은 미래를 예견하게 한다. 전전두엽에서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미래 예측은 인간에게 불안감을 선사한다. 반면, 불안과 걱정은 미래를 예측하는 전전두엽 기능의 산물이다. 불안한 미래가 인간 정신 활동의 본질적 요소이기도 한 것이다. 불안은 인간을 현실의 안주에서 벗어나 행동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같은 행동이 인간을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로 탄생시켰다. 시간의식과 예측 능력은 해마의 일화기억이 빚어낸, 놀라운 선물이다. 해마의 기억 능력과 전전두엽의 예측 기능 덕에 인간은 현재의 구속에서 벗어나 미래라는 가상 세계의 문을 활짝 열 수 있었다.
기억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 기억의 사슬엔 한 사건을 구성하는 개별 요소가 목걸이에 꿰어진 구슬처럼 순서대로 엮여 있다. 해외여행 기억을 예로 들어보자. 분주하게 공항을 뛰어다녔던 일, 낯선 도시를 가로질러 호텔을 찾아가던 일, 이튿날 박물관에 갔던 일이 차례로 떠오를 것이다. 그중 공항에서의 기억은 대략 출국과 항공기 탑승, 이륙하는 비행기 창문으로 비치던 도시 야경 등 적게는 서너 개, 많게는 일고여덟 개의 요소로 구성되는 게 일반적이다. 범위를 ‘해외여행 전체’로 넓혀도 기억의 구성 요소는 여기서 크게 줄거나 늘지 않는다.
기억의 길이는 ‘경험한 시간’보다 ‘새로운 사건의 출현 횟수’에 비례한다. 젊은 시절 경험한 일은 대부분 새롭기 때문에 기억의 팻말이 머릿속에 촘촘히 표시돼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경험이 줄어들며 기억 팻말 간 거리 간격이 길어진다. 세월이 빨리 흘러가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다. 매일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사람, 이를테면 죄수는 그날그날의 사건기억이 거의 동일하므로 종종 시간이 포개어진다. 자연히 새로운 사건이 빈약할수록 시간은 빨리 간다. 완벽한 반복은 변화를 허용치 않고 변화가 없으면 시간도 사라진다. 시간의식은 ‘변화를 감지하는 내면 느낌’의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다시 해외여행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출발과 도착은 비교적 명확하게 떠오르지만 (대부분 자동차 안에서 보냈을) 이동 시간에 대한 기억은 흐릿할 것이다. 이 역시 기억이 ‘7개 미만 구성 요소의 순차적 배열’이란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뇌과학적으로 정의된 기억은 서로 연결된 대뇌피질 내 피라미드 신경세포 집단이 만들어내는 전압 서열이다(서열이 발생하는 건 해마 신경세포가 각각의 사건을 전압 유형으로 바꿔 순서대로 저장하기 때문이다).
기억의 구성 요소가 순차적으로 배열되는 덕분에 인간은 우연히 떠오른 단편적 기억만으로도 관련 기억 전체를 소환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컴퓨터 프로그래머 출신 신경생리학자 제프 호킨스(Jeff Hawkins)는 “이 서열이야말로 대뇌 신피질 기억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호킨스의 이론에 따르면 사건기억의 저장과 회상엔 세 가지 주요 속성이 있다. 첫째, 사건기억은 전압 유형의 서열을 인지한다. 인간이 보거나 듣는 감각정보는 해마에서 초당 20회, 많게는 100회가량 반복하는 전압 파형의 순차적 서열로 변환된다. 하나의 사건은 특정 장소에서 특정 행동이 시간 순으로 전개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이때 장소와 행동의 변화가 곧 서열화된 시·공간의 유형(pattern)이 되고 뇌는 이 유형의 서열을 전압 파동(pulse)으로 부호화한다.
둘째, 사건기억은 (언어라는) ‘불변표상’ 형태로 저장된다. 시각 정보는 망막에 입력되는 시각 자극이 대뇌 시각피질을 거치며 유사한 형태와 색깔로 범주화된 후 기억된다. 이때 범주화된 지각 대상은 대부분 언어라는 불변표상 형태로 전전두엽에 전달, 의식된다.
셋째, 사건기억은 ‘자동연상회상’으로 인출된다. 기억은 구성요소가 하나만 제시돼도 전체가 자동으로 회상된다. 이를 자동연상회상이라고 한다. 자동연상회상은 기억이 세타파의 진폭 속에 감마파 서열로 부호화돼 있어 나타나는 현상이다[1]. 감마파 서열을 구성하는 각각의 감마파는 다수의 피라미드세포와 억제성 개체신경세포 간 상호작용으로 생성되며 하나하나가 전부 기억의 구성요소로 작용한다. 사건(일화)기억은 개인의 경험을 이야기로 구성할 수 있는 기억이며, 그 용량은 (1970년대에 이미 밝혀진 것처럼) 무한대다. 의지를 갖고 집중적으로 훈련하기만 하면 누구나 판소리 전문가처럼 하나의 이야기를 서너 시간 동안 완전히 기억해 구술할 수 있단 얘기다.
반면, 전전두엽에서 처리되는 의미기억은 그 용량이 제한적이어서 7개 미만의 개별 사실만 처리할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은 “하나의 세타파 내에 7개 내외의 감마파만 존재할 수 있다”라는 측정 결과와 관련 있는 걸로 추정된다. 쥐 대상 실험 결과, 낮 동안 해마에서 부호화된 일화기억이 서파수면[2] 도중 대뇌피질로 전달되는 현상이 밝혀지고 있는 것. 인간이 접하는 현실이 매일 반복되는 사건 유형인 만큼 이 역시 일정 순서로 되풀이되면 이후 일어날 일을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다.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1] 뇌파는 뇌 소유자의 정신활동 상태와 평균 진동수에 따라 △델타파(1~4Hz) △세타파(4~8Hz) △알파파(8~13Hz) △베타파(13~30Hz) △감마파(30~120Hz) 등 다섯 종류의 파형(波形)으로 구분된다. 이중 세타파는 꿈을 꿀 때의 기본 뇌파, 감마파는 뇌 속 정보들이 이리저리 조합돼 인지 작용이 발생했을 때 나타나는 뇌파로 각각 이해될 수 있다
[2] slow-wave sleep. 깊은 수면 도중 대뇌피질에서 생성돼 흐르는, 약 1Hz의 느린 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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