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한마디로 요약하면 ‘디지털-피지컬 통합’
위 도표는 지난해 1월 열린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WEF) 연례회의 결과 보고서를 요약한 것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세계 각국 석학들은 향후 세계 경제의 흐름을 “제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는 과정”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과정에서 핵심 개념으로 등장한 게 바로 ‘디지털-피지컬 통합(digital-physical integration)’이었다(이와 관련, 보다 자세한 내용은 지난해 12월 7일 자 스페셜 리포트 ‘디지털, 세상을 뒤집다 ②경제·경영_4차 산업혁명은 이미 시작됐다’를 참조할 것).
디지털 기기와 (그 인프라 역할을 담당하는) 정보통신 기술의 개발은 제3차 산업혁명 과정에서 이미 시작됐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TV나 음향 기기, 시계 등 아날로그적 기계 패러다임으로 제조되던 기기가 디지털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컴퓨터 등 독립적 정보통신 기기를 활용한 정보 교류가 활성화되는 수준에 그쳤다. 다시 말해 이 시기 디지털은 인간의 삶에서 ‘개별적으로 이용되는’ 아이템에 불과했다.
4차 산업혁명이 3차 산업혁명과 다른 지점이 바로 여기다. 디지털이 더 이상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일상에 통합되는 존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생활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디지털 영역과 물리적(physical) 영역이 통합돼 새로운 시스템을 창출한단 얘기다. 대체 이건 무슨 의미일까?
첨단 IT 기술, 물리적 공간으로 녹아 들어가다
‘디지털’의 어원은 ‘손가락(혹은 발가락)’을 지칭하는 라틴어 ‘디기투스(digitus)’다. 그런데 이 말이 오늘날처럼 ‘컴퓨터를 근간으로 하는 정보통신 기술 세계’를 가리키는 용어가 된 연유를 둘러싸곤 의견이 서로 엇갈린다. 혹자는 “열 손가락을 전부 사용해 컴퓨터에 뭔가를 지시하는 모습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0’과 ‘1’ 등 두 개의 숫자(digit)로 모든 작업이 이뤄진단 의미의 영어 표현(‘two-digital operation’)에서 ‘둘(two)’이란 뜻이 빠지면서 현재 꼴을 갖추게 됐단 설(說)도 있다. 유래야 어찌됐든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하고 그게 일상에서 점점 더 폭넓게 활용되면서 디지털이란 말의 의미도 날로 풍부해져 왔다.
이번엔 ‘피지컬’의 유래를 따져볼 차례다. 역시 라틴어로 ‘자연’을 뜻하는 ‘피지쿠스(physicus)’에서 유래된 이 단어는 중세 유럽에서 ‘물질’이란 의미로 특화돼 쓰였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 피지컬은 (정신과 대조되는) 육체다. 또 세상에서 피지컬이란 가시(可視)적 물질로 구성된 부분, 즉 일상의 현실 세계를 가리킨다.
결국 디지털-피지컬 통합은 첨단 정보통신 기술이 실제 물리적 공간에서의 삶에 녹아 들어가 새로운 시스템으로 거듭나는 현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기엔 이런 현상이 인류의 경제 활동 전반으로 확산될 거란 얘기다. 실제로 ‘2016 세계경제포럼 보고서’가 발표된 이후 세계 각국의 선도적 연구자와 기업은 디지털-피지컬 통합의 구체적 진행 상황을 꾸준히 연구해왔다.
1억5400만 쇼핑 인구, 매장 찾은 이는 44%뿐?
디지털-피지컬 통합이 가장 눈에 띄게 구현되는 분야는 단연 ‘쇼핑’이다. 이미 미국 등 선진국에선 일명 ‘쇼핑몰’로 불리는 물리적 쇼핑 공간이 한산해진 지 오래다. 물론 쇼핑 시장 규모 자체가 줄어든 건 아니다. IBM사가 자체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추수감사절 주말에 쇼핑으로 시간을 보낸 소비자는 1억5400만 명이었다. 전년도에 비해 300만 명이나 늘어난 숫자다. 하지만 이중 실제 매장을 찾아 쇼핑에 나선 비중은 44%에 불과했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체감된’ 경기는 1년 전보다 절반 이상 나빴던 셈이다.
이런 현상이 비단 미국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니다. 요즘 쇼핑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 간 경계는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요즘 소비자는 온라인에서 산 옷을 오프라인 매장에서 환불(혹은 교환) 받는가 하면, 오프라인 매장을 방문해서도 스마트폰으로 자신이 원하는 아이템 관련 정보를 검색하며 매장에 진열된 제품 사양과 꼼꼼히 비교한다. 온라인상에서의 매장 정보 통합이 가능해져 고객이 원하는 색상과 크기의 옷을 저 멀리 떨어진 매장에서 택배로 받아볼 수 있게 해주는 서비스는 이제 흔한 게 됐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다 편리한 맞춤형 서비스’는 그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업계의 지각 변동을 의미한다. 미국의 인기 여성 의류 브랜드 ‘더 리미티드(The Limited)’는 250개에 이르는 오프라인 매장을 전부 폐쇄하고 4000명의 직원을 내보냈다. 하지만 사업 자체를 접은 건 아니었다. 온라인 쇼핑몰 웹사이트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방식으로 디지털 쇼핑 시스템은 더 강화했기 때문이다. 시어즈∙메이시즈 등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유명 백화점도 이런 추세를 비껴가진 못했다. 2017년 7월 현재 시어즈는 150개 지점을, 메이시즈는 100개 지점을 각각 폐쇄할 예정인 걸로 알려졌다.
폐쇄 조치 이후 남은 오프라인 매장은 대부분 ‘플래그십 스토어(flagship store)’ 형태로 바뀔 전망이다. 기업들은 여기에 최신 IT 기술을 접목, 새로운 고객 유치에 앞다퉈 나서고 있다. 세련된 디지털 사이니지로 고객의 눈길을 끄는가 하면, 최근엔 후방 카메라와 디지털 미러로 고객이 옷 입은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을 갖춘 매장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증강현실(AR) 기법을 활용, 자신의 집에 특정 가구나 커튼, 카페트 등 인테리어 아이템이 잘 어울리는지 미리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서비스도 등장했다.
쇼핑 공간에서의 디지털-피지컬 통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IoT) 기술과 결합, ‘커넥티드 스토어(connected store)’로 변모하는 매장이 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요즘 매장들은 디지털 사이니지에 실시간 영상을 쏴 고객에게 생동감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고객이 힘들게 카트를 끄는 대신 스마트폰 등 모바일 기기를 활용, 원하는 상품을 ‘디지털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계산대에서 바로 받을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역시 증강현실을 활용, 옷을 사기 위해 실제로 입고 벗을 필요조차 없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아주는 서비스도 꽤 많은 의류 매장에서 제공되는 실정이다.
IoT 구현 범위, ‘인간 활동 전반’으로 확장하면…
디지털-피지컬 통합은 쉽게 말해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사물인터넷의 속성’이다. 모든 게 연결된(connected) 세상에선 ‘디지털 신호가 물질들을 움직여 물리적 차원의 작용을 일으키는’ 과정 일체를 디지털-피지컬 통합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물인터넷은 문(door)이나 자동차, 조명 등 그야말로 ‘사물’에 그 작용이 구현되는 것이며, 디지털-피지컬 통합은 그보다 더 폭넓게 인간 활동 세계에 적용된다.
예를 들어 여행 상품에서의 디지털-피지컬 통합도 가능하다. 황금연휴를 이용해 특별한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이 여행사에 들러 하는 행동이 달라질 수 있는 것. 과거 여행 상품을 결정하기 전 고객이 참조하는 정보는 여행사 직원이 보여주는 상품 팸플릿과 관련 설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앞으로의 풍경은 이제까지와 사뭇 달라질 게 분명하다. 여행사를 찾은 고객은 사무실에 비치된 가상현실(VR) 고글을 쓰고 편안한 라운지 체어에 누워 눈앞에 펼쳐지는 휴양지의 풍광을 감상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해변의 모습을 즐기다 해변가에 위치한 호텔에 들어가 방을 둘러본 후 ‘여기다!’ 싶을 때 손에 쥔 디지털 스틱의 버튼을 누르면 선택 완료.
고글을 벗으면 여행사 직원은 앞 벽면에 걸린 프로젝터로 방금 고객이 선택한 숙박소와 관광지 관련 정보를 모두 보여준다. 교통편과 가격, 유의할 점 등을 꼼꼼히 점검한 후 최종 결정을 내리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그 사이, 빅데이터는 고객이 편리한 시간대에 맞춰 모든 일정과 정보를 자동으로 정리, 고객 스마트폰으로 전송한다.
디지털-피지컬 통합이 꽤 활성화돼 있고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분야는 ‘헬스케어(healthcare)’다. 21세기 소비자는 건강이 ‘질병 치료’에 그치지 않는단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바이오리듬을 점검한 후 직장이나 집에서의 작업 시간과 환경, 여가 활용법 등의 생활 습관과 통합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매일매일 일정을 관리해주는 한편, 건강 상태와 계절 흐름에 따라 적절한 식단까지 조언해주는 ‘토탈 헬스케어 시스템’이야말로 디지털-피지컬 통합의 가장 이상적 형태일 것이다.
굳이 자명종을 맞춰놓지 않아도 아침 적정 시각에 깨워주고,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운동을 유도하며, 운동 도중 좋아하는 음악을 딱딱 맞춰 재생하는가 하면, 영양 정보를 고려한 아침 식사까지 배달해주는 스마트폰 연동 애플리케이션 서비스가 있다면 어떨까? ‘디지털’ 차원에서 기획돼 ‘피지컬’ 일상을 움직이는 이런 기술이야말로 고단한 일상을 견디게 해주는 동반자 겸 지원군일 것이다.
디지털-피지컬 통합이 접목될 수 있는 분야는 이 밖에도 많다.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것만 해도 교육·물류·교통·콘텐츠 등 다양하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물리적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으며, 사이사이 디지털이 결합될 여지가 풍부하단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 아닌 ‘우리 자신’을 바꾸는 과정
“4차 산업혁명의 특성은 우리가 하는 일을 바꾸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바꿉니다.”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 세계경제포럼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이제까지 살펴본 내용은 슈밥 회장 표현에 비춰보면 ‘우리가 하는 일’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바꾼다’는 말의 의미는 뭘까?
언뜻 ‘생활 방식이 달라지면 생각이나 지향점도 달라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의 디지털-피지컬 통합 기술 진전은 이보다 훨씬 더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변화를 시사한다. 이를테면 인체 기능을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방향으로 IT 기술을 활용하는 건 어떨까?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 내장 기관을 만들어 시술하는 시나리오도 떠올릴 수 있다. 실제로 이렇게 만들어낸 인공 내장 기관은 임상실험 결과, 이전까지의 대체 장기에 비해 거부(면역) 반응이 없는 걸로 보고되고 있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피지컬이란 말의 의미가 세상의 물질적 부분에 대한 적용뿐 아니라 인체에 대한 적용을 의미하기도 하니 이런 현상의 등장은 놀라운 것도 아니다.
벌써 몇백만 년째 지구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인간. 그 시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보다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갖가지 노하우를 개발, 축적하는 과정이었다. 4차 산업혁명은 그런 기술의 누적이 인류의 존재 자체를 바꾸는 과정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인간은 늘 준비돼 있었다. 신기술을 빨리 채택하고 앞서가는 것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 기술을 신중하게 살펴보는 것에 대해서도. 빠른 속도로 인류를 압도해갈 4차 산업혁명, 그리고 그 핵심 키워드로 꼽히는 디지털-피지컬 통합 과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술의 주인은 인간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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