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비안 해적’의 본거지, 블록체인 선진국으로 거듭나다
‘카리브해의 실리콘밸리’. 최근 카리브해 도서(島嶼)국가 중 하나인 바하마연방(Commonwealth of Bahamas, 이하 ‘바하마’)이 밀고(?) 있는 표현이다. 지난 6월 20일<현지 시각>부터 사흘간 개최된 ‘바하마 블록체인·가상화폐 컨퍼런스’에선 “바하마를 ‘카리브해의 새로운 실리콘 수도(new Silicon capital in the Caribbean)’로 만들겠다”는 공언까지 나왔다. 후버트 미니스(Hubert Minnis) 바하마 수상의 기조연설 자리에서였다.
바하마를 잘 모르고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즐겨 본 이라면 카리브해 도서 지역을 ‘해적들이 설치는, 버림 받은 섬’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독일 혼성그룹 보니엠(Boney M)의 ‘바하마 마마(Bahama Mama)’ 같은 노래는 바하마에 ‘활기 넘치는 남쪽 바닷가 휴양지’ 이미지를 덧입히기도 한다. 그런 곳에 실리콘밸리의 심장부를 만들겠다? 언뜻 난센스처럼 들리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2018년 가을, 바하마에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파란만장한 역사 덕에 ‘얘깃거리’ 넘쳐나는 관광국
700개 이상의 섬과 암초로 이뤄진 바하마는 바다 면적까지 합하면 47만㎢ 남짓한 영역에 넓게 분포해있다. 올 1월 세계연합(UN)이 집계, 발표한 국가별 인구조사[1]결과에 따르면 총인구는 약 38만7000명. 인구 규모로만 따지면 그야말로 ‘미니 국가’다.
바하마가 위치한 곳은 엄밀히 말하면 카리브해가 아니라 그보다 약간 위쪽의 대서양 해역이다. 원인 미상의 선박·항공 실종 사건으로 악명 높은 버뮤다 삼각지대(Burmuda Triangle)에, 국가로선 유일하게 전역이 걸쳐있다. 서쪽으론 미국 플로리다주(州), 남쪽으론 쿠바와 아이티와 인접해있어 유럽과 아프리카 쪽에서 볼 땐 ‘미국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한다. 실제로 콜럼버스[2]가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첫발을 디딘 곳이 바하마 동쪽 끝 항구 산살바도르(San Salvador)였다.
바하마의 지리적 위치는 이 나라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능히 짐작하게 한다. 적어도 유럽 사람들이 신대륙에 발을 들인 15세기 말 이후부터 6000년 이상 지난 지금까진 그렇다. 콜럼버스가 이끄는 스페인(당시 에스파냐) 선박이 도착한 후 불과 1세기도 안 돼 바하마 원주민 인구는 전염병과 강제 노역으로 90% 이상 감소했다. 이후 영국 식민지가 되고선 한동안 영국과 스페인 간 전쟁에 휘말렸다.
17세기 후반, 승기(勝機)를 잡은 영국은 미국 남부 소재 식민지 부호들에게 바하마를 임대했다. 이후 약 100년간 바하마는 대서양을 무대로 활동하는 해적들의 본거지가 됐다(영화 속 바로 그 무대다). 카리브 해역에 속해있진 않았지만 카리브해를 누비는 해적이 언제든 미국 동해안을 따라 피신하기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이 일은 18세기 말 미국 독립 이후 미국과 영국 간 갈등의 불씨를 제공하기도 했다).
19세기 바하마는, 그때까지 남아있던 노예제의 잔재 속에서 드물게 자유를 상징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대표적 사례가 1841년 미국 상선 크레올호에서 일어난 노예들의 반란(The Creole Case)이었다. 사건 당시 크레올호는 흑인 노예 135명을 싣고 버지니아를 출발, 뉴올리언스로 향하고 있었다. 선원들을 제압한 흑인 반란 지도자는 배를 바하마 최대 항구인 나소(Nassau)로 돌렸다. 그때만 해도 나소는 영국 식민지였는데 영국은 1834년 노예제를 공식 폐지한 상태였다. 다시 말해 나소는 ‘도망친 노예의 자유가 보장되는’ 도시였다. 실제로 영국이 노예제를 폐지하고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바하마에서만 447명의 흑인 노예가 자유를 되찾았다.
바하마는 정치적으로 영연방 소속 독립 국가다. 하지만 지리적 인접성 때문에 사회·경제적으론 미국과 오히려 더 밀접하다. 이 같은 특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는 산업이다. 이를테면 1920년대 미국 전역에 금주(禁酒)령이 내려졌을 때 바하마는 밀주를 생산, 판매하며 호황을 누렸다. 이후 미국과 쿠바 간 관계가 경색되면서부터 내내 경제 호전 계기를 찾지 못하다 1960년대 들어 관광 산업이 발전하며 다시 반짝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이때에도 관광객 대다수는 미국인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펴낸 ‘월드팩트북(World Factbook)’에 따르면 2018년 1월 현재 바하마의 1인당 연간 국민소득은 2만5100달러. 아메리카 대륙을 통틀어 상위 10위 안에 드는 경제력이다. 최대 소득원은 역시 관광으로 국가 소득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바하마 국민의 절반 이상을 고용하는 산업 역시 관광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산업은? 정답은 뜻밖에도 ‘금융’이다.
역외금융 활발… 재산 은닉 등 오명 벗으려 안간힘
금융업이 바하마의 주요 산업이라곤 하지만 바하마의 전반적 금융 상황에 대한 국제 평가가 우수한 편은 아니다. 미국 경제 전문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과 헤리티지재단[3]이 매년 공동으로 발표하는 경제자유지수(Index of Economic Freedom) 올해 측정 결과에 따르면 바하마의 순위는 74위. 미국 가까이에 위치해있고 북·남미와 유럽, 아프리카를 잇는 요충지란 점을 감안할 때 그리 인상적인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요즘 바하마에선 자국 경제 규모와 어울리지 않는 대형 금융 서비스가 행해지고 있다. 비결은 역외금융(offshore service). 역외금융이란, 쉽게 말해 해외 기관이나 개인이 면세 등을 목적으로 바하마 금융 체계를 활용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정확한 파악은 어렵지만 2016년 세상을 시끄럽게 한 일명 ‘바하마 누출(Bahamas Leaks)’<박스 참조> 사건으로 수면 위에 드러난 부분만 살펴봐도 글로벌 역외금융 시장에서 바하마의 위상이 어떤 수준인지 짐작할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바하마 정부 입장에선 ‘불투명한 금융 시장’이란 안팎의 인식을 타개하기 위한 돌파구가 필요했고, 그 대안이 디지털 금융이었다. 더욱이 수백 개 섬으로 흩어져있는 국토 구석구석까지 은행을 세워 (오프라인) 금융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는 입장에서 디지털 뱅킹이야말로 국가 차원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이와 관련, 케빈 피터 턴퀘스트(Kevin Peter Turnquest) 바하마 부총리 겸 재무장관은 바하마 블록체인·가상화폐 컨퍼런스 오찬 연설 당시 바하마 금융 체계 디지털화(化)에 대한 정부 측 의지를 아래와 같이 밝혔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나라에 속하는 섬 지역에서 많은 상업 은행이 규모를 줄이거나 문을 닫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도서국가의 특성상 섬 간 이동이 불편합니다. 노인 인구는 더 말할 것도 없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안정적 디지털 금융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블록체인 기반 가상화폐, 중앙 공식 통화로” 선언
오늘날 바하마 금융 당국의 목표는 단순한 핀테크(fintech), 즉 온라인을 활용한 금융 거래 차원을 넘어선다. “중앙은행 공식 통화(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CBDC)로서 가상화폐를 개발하겠다”고 선언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바하마보다 먼저 국가 차원에서 이 같은 결정이 내려진 곳은 노르웨이와 태국, 영국이 전부다).
컨퍼런스 당시 턴퀘스트 부총리 겸 재무장관은 블록체인 기술 기반 디지털 화폐 도입이 부패 청산에 기여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표명하기도 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블록체인은 ‘분산형 회계 원장’ 패러다임에 기반한 기술이다. 거래 과정 일체의 기록이 투명하게 남을 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 과정에서 생성된 기록을 변형, 훼손할 수 없다[4]. 자금 이동 과정이 100% 명확하게 추적, 공개되는 사회에서 부정부패가 발붙일 수 없단 사실은 자명하다.
실제로 바하마의 블록체인 기술은 추상적 목표나 구호 수준을 넘어서서 사소해 보이는 것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한 예로 지난달 바하마의 국가 훈련 기관인 ‘내셔널 트레이닝 에이전시(NTA)’ 직업 준비 프로그램 참석 대학생에게 발급된 증명서는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 제작됐다. ‘블록서트(Blockcerts)’로 명명된 이 문서를 발급 받은 대학생은 누구나 취업 준비 단계에서 지원하려는 회사에 증명서를 간단히 제출할 수 있다. 위조 시비에 휘말릴 우려 따윈 당연히 없다. 조작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업과 지원자 모두 필요한 자료를 믿고 교환할 수 있는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금융 제도에 도입했을 때의 장점은 또 있다. 필요한 데이터를 일단 저장하고 이후 변동이 생길 때마다 업그레이드해주는 시스템을 확립하면 서류를 여러 종류 갖추는 데 들일 시간을 아낄 수 있다. 특히 바하마처럼 작은 섬들로 구성된 나라에서 그 차이는 꽤 크다. “바하마에선 어떤 면허를 취득하든 관련 서류를 갖추는 데에만 평균 22일이 걸립니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이 도입된 증명서를 활용하면 그 시간을 하루 이내로 단축할 수 있죠.” 미주개발은행[5] 소속 노동시장 전문가 페르난도 파본(Fernando Pavón)의 설명은 그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미주개발은행은 올 4월 시작된 블록서트 발급 프로그램을 후원하기 위해 바하마 정부에 보조금을 지원했다).
블록체인의 잠재적 가치에 대한 바하마 국가의 기대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게 ‘검은 뒷거래 방지’ 관련 대목이다. 바하마는 국제투명성기구[6]가 매년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Corruption Perceptions Index, CPI)에서 20위권에 올라있다(지난해엔 176대 조사 대상국 중 24위를 차지했다). 카리브해 연안에 위치한 국가들 중 비교적 덜 부패한 축에 든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영국과 여러모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 종종 ‘돌발 변수’가 발생한다. 일단 두 나라로 투자이민을 가려는 이들이 가장 먼저 거쳐가는 나라이다 보니 그 과정에서 여권 조작이나 신분 은닉 등의 범죄 행동 발생 빈도가 높다. 아담 그리스트(Adam Grist) 서치드[7] 최고경영인(CEO)에 따르면 블록체인 기술은 그 과정에서도 활용될 수 있다. 즉 여권 발급 절차 일체를 투명하고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잠재 가치 확인된 블록체인, 바하마가 ‘실험장’ 될까?
인공지능(AI)처럼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빠른 속도로 이용하는 기술이 발달하고, 사람들이 점점 더 거기에 의존하게 되면서 ‘공정하고 투명한 기술’ 문제는 날로 심각해지는 추세다. 블록체인이 빛을 발하는 지점 역시 바로 거기다. 문제는 ‘그 이후’에 대한 실질적 성과가 아직 가시화되지 않고 있단 사실이다. 블록체인의 잠재성이 실질적 파급 효과로 이어지려면 상당량의 투자와 시행착오는 불가피하다.
그 와중에 “블록체인 기술의 선구적 실험장이 되겠다”고 자처한 바하마의 행보는 신선하다. 한때 국가적 감시를 벗어난 해적들의 본거지였던, 또 비인간적 정책을 피해 도착한 노예들에게 자유를 선사하는 피난처였던 이 ‘700여 개 섬으로 구성된 나라’는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화폐)을 만나 또 어떤 폭발력을 갖추게 될까? 공교롭게도 블록체인과 가상화폐를 주제로, 하필이면 바하마에서 열린 6월 컨퍼런스가 예사롭지 않은 이유다.
[1] 원제 ‘World Population Prospects 2017’(다운로드 링크는 여기). 2015년 데이터가 최신이다
[2] Christopher Columbus(1451~1506). 이탈리아 탐험가
[3] 1973년 설립된 미국 보수주의 성향 싱크탱크. 워싱턴D.C.에 본부를 두고 있다
[4] 블록체인의 개념에 관해 보다 상세히 알고 싶다면 지난 1월 10일자 스페셜 리포트 ‘사슬(chain)처럼 연결된 벽돌(block), 세상을 뒤흔들다’를 참조할 것
[5] Inter-American Development Bank(IDB).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지역의 경제·사회 개발을 위해 1959년 설립된 지역 은행. 본부는 미국 워싱턴 D.C.에 있다
[6] Transparency International. 독일 베를린에 본사를 둔 비정부기구로 1993년 설립됐다
[7] SEARCHED.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글로벌 블록체인 마케팅 에이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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